남도 무형유산으로 ‘역사 숨결’ 고즈넉이 담아내
풍년·감사 기원 넘어 애국 주역으로 승화
노래 속에 역사적 사건 담아 새 의미 창출
‘임을 위한 행진곡’· ‘아리랑’도 같은 맥락

 

서남해 민중들에게 강강술래는 풍년을 기원하고 감사하는 노래의 수준을 넘어 바다를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한 민중들의 임진왜란 승전가로 승화됐다.사진은 강강술래 한 장면./송기태 교수 제공

인류가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유산으로 남기고 전승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형의 글과 사물이고, 다른 하나는 말과 행위다. 전자는 유형의 유산이고 후자는 무형의 유산이다. 유형유산은 생성할 때부터 오랫동안 변치 않도록 고안되어서 화석처럼 남게 되고, 무형유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기 마련이어서 새로운 문화가 덧씌워지며 현재화된다.

서남해의 연희문화와 축제적 전통을 대표하는 강강술래를 유산으로서 다시 들여다본다. 강강술래는 음력 8월 보름달이 뜰 때 젊은 여인들이 둥근 달처럼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춘다. 여성들의 놀이이자 음악이기에 예쁘고 우아할 것 같지만, 실제는 땅이 꺼질 듯이 뛰어다니고 왁자지껄한 젊음의 열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젊은시절 강강술래를 했던 할머니들은 “강강술래를 하고 나면 다음 날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였다.”고 술회하곤 한다. 이러한 강강술래는 음력 8월의 추수 시기와 맞물려 있고, 인간의 생산력을 상징하는 젊은 여성들의 놀이라는 점에서 농사의 풍년기원과 긴밀히 관련된 축제적 연행예술임이 명확하다.

그런데 강강술래의 유래를 후대에 전해준 사람들은 한결같이 ‘강강술래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강강술래를 부른다고 해서 왜군들이 속거나 사기가 꺾였을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렇게 이야기 이야기하며 수백 년 동안 전해 온 것일까? 실제 강강술래의 사설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도 담겨있다.

강강술래 후렴구를 들여다보자.

강강술래 누가냈냐 삼백여년 임진때에

충무공이 내였다네 삼천리 우리강산

삼천만 우리동포 사십년의 노예생활

돌아왔네 돌아왔네 용기좋은 우리용사

용헌금 드는칼로 바다건너 오랑캐를

일시소멸 했을터니 인정많고 도덕많아

개과천선 기다리니 자수하고 돌아오라

태극기발 휘날리고 대한민국 빛날적에

주저말고 돌아오라.

여성들이 풍년을 기원하고 감사하며 벌이는 축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노래 속에 역사적 사건을 담아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덧씌워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서남해 섬사람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자 후대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놓은 것이리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역사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기록하여 교육하고, 서울 광화문 대로변에 한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장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임금마저 도성을 버리고 피난할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바다를 지켜낸 서남해의 민중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 ‘명량’에서 수군으로 참여했던 병사가 전쟁이 끝난 후 “우리가 이렇게 노력한 것을 후손들이 몰라주면 호로자식이지.”라며 웃음을 짓는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서남해의 수군과 민중들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말이다.

앞에서 무형유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문화가 덧씌워진다고 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남해 민중들에게 강강술래는 더 이상 풍년을 기원하고 감사하는 노래가 아니고, 바다를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한 민중들의 임진왜란 승전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일반 민중들은 문자를 지니지 못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보급했지만 여전히 한자 중심의 시대였고, 민중들은 문자를 지니지 못한 존재였다. 이순신 장군과 대표적인 장수들은 공적에 올라 대대로 전해지지만, 수많은 장병과 그들을 응원했던 민중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나라를 지킨 자긍심을 후대에 전하는 방식은 말, 즉 구전(口傳)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남해 민중들은 매년 8월 보름이나 정월 보름에 부르는 강강술래를 통해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으로서 스스로를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용은 강강술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5·18 광주 민중항쟁의 기념곡은 당시 시민들이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그래서 기념식 때 공식적으로 애국가를 연주하더라도 광주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그것뿐인가. 국가를 넘어서 한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는 ‘아리랑’이다. 남북한을 넘어서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들이 민족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자 할 때는 아리랑을 부른다. 애국가는 공식적이지만 그것이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다.

남도의 무형유산을 단순히 예능적 차원에서 인식하지 않고, 선대의 전승자들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되짚어볼 때 우리의 역사는 현재가 될 수 있다.

글·사진/송기태(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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