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한때 서로 함께 죽자 살자 약속하며 사랑한다며 맨살을 부대끼고 살았으나, 남은 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슴 아린 서글픈 애상(哀傷)뿐이라니! 남녀 간에 사랑한다는 것! 사람이 산다는 것, 인생(人生)이란 과연 이러한 것이었던가? 그날 이후 조대감은 깊은 상념(想念)에 줄곧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었다.
벌써 또 한 해가 가고 봄이 돌아왔다. 아들 옥동이 하늘 천(天)이 무엇인지 찾는다고 나무지게 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기 일 년, 이제 땅 지(地)가 무엇인지 찾는다고 소 몰고 논밭 쟁기질하러 다니기 일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참으로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조대감은 윤처사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로 작정한 이상 묵묵히 참고 견디고 있었던 것이었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아침 조대감은 예전과 똑같이 맛있는 음식들을 장만하라고 했다. 사실은 아들 옥동의 힘든 모습을 보지 않는 게 차라리 더 좋을 것 같아 윤처사 집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일 년이 지났으니 그리운 아들 옥동도 보고 지금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 심히 궁금하였던 것이었다.
조대감은 또 쌀가마니며 맛있는 떡과 과일과 기름에 지져 만든 음식들을 말 등 위에 가득 싣고 윤처사 집으로 사내종을 앞세워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정오 무렵 윤처사 집에 당도하니 윤처사는 너른 대청마루 서당(書堂)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대감은 조금 느긋해진 마음으로 사내종에게 말고삐를 넘기며 음식을 서당으로 가지고 올라오게 하고는 그곳으로 갔다. 윤처사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빼곡하게 앉아있는 서당 아이들을 한눈에 휙 휘둘러 보는데 역시 아들 옥동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지난해보다 기대가 많이 누그러져 버린 조대감은 쩝! 입맛을 다시고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내려와 외양간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황소도 쟁기 지게도 거기 그대로 있었다. 지금쯤 황소를 몰고 쟁기질하고 있을 옥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소도 쟁기도 멀쩡하게 그대로 있다니 그렇다면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조대감은 나무를 쌓아놓은 헛간으로 가보았다. 거기에도 아무런 흔적(痕迹)이 없었다.
‘허허! 이 녀석이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조대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곳을 나왔다. 조대감은 윤처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점심을 먹고는 또 막연하게 옥동이 오는 것을 기다릴 밖에는 없었다.
사랑방 마루에 앉아서 이제나저제나 가슴 졸이며 조대감이 간간이 대문을 눈 여기고 있는데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석양 무렵 머리에 흰 띠를 둘러 묶고 바짓가랑이에 각반을 둘러찬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불쑥 나타났다. 조대감이 얼른 눈여겨보니 아들 옥동이였다. 그런데 머리에 두른 웬 하얀 띠라니? 보니 영락없는 상(喪)두꾼이었다. ‘어허! 이제 보아하니 천한 상놈들이나 하는 사람이 죽어 갈 때 상여(喪輿)를 매는 상두꾼 노릇을 옥동이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게 정말일까?’ 조대감은 소스라치게 놀라 대실경악(大失驚愕) 넋이 나간 눈빛으로 입을 떡 벌린 채 옥동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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