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천하’ 5년 2개월 간 대장정 마무리
남도 곳곳 전설·설화 재각색한 소설로
독자들에게 보다 풍성한 읽을거리 선사
"후손 위한 기록으로서의 창작 계속 할 것"

남도일보 독자들에게 보다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온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가 지난 10월 5년 2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2020년 9월 1일 연재를 시작한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는 남도 곳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설화를 재각색한 소설로, 독자들에게 보다 풍성한 읽을거리와 재미를 선사해왔다.
소설 ‘야설천하’는 1화 ‘꾀 많은 제자’를 시작으로 ▲2화 ‘명필 이삼만’ ▲3화 ‘최고의 사윗감’▲4화 ‘기생 소백주’ ▲5화 ‘명당과 아기장사’ ▲6화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상’ ▲7화 ‘섬섬옥수’ ▲8화 ‘인간의 마음’ ▲9화 ‘인연’ ▲10화 ‘천지인’ 등 1천 회에 이르는 글을 연재했다.
대장정을 마친 소설가 강형구 작가는 "지난 5년 2개월간 글을 쓰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다음화를 기다릴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힘든 고비를 넘겨온 것 같다"면서 "남도일보를 통해 또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어 감사드리고 뿌듯하다. 그동안 소설 ‘야설천하’를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남도일보는 지난 5년 2개월간 쉼없이 소설을 연재해 온 강형구 작가를 만나 작업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등을 들어봤다.
-2020년 9월 1일 소설 연재를 시작으로 2024년 10월까지 5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소감은.
▶어쩌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엉겁결에 아무 준비도 없이 대문을 열고 한 번 길을 떠나 물도 여물도 먹지 않고 단숨에 오만 리를 달려갔다 온 느낌이다. 어떻게 지나왔는지 숨이 컥컥 찰 따름입니다. 머리가 반백인 50대에 길을 나섰는데 돌아와 집에 당도하고 보니 웬 초로의 백발의 육십 노인이 마당을 지나가고 있군요. 능력 많은 뛰어난 실력가였더라면 지나온 날들이 영광의 길이었을 텐데…본시 어리석고 아둔한 저는 참으로 힘에 버거운 무거운 지게를 등에 한 짐 짊어지고 거친 산길을 간신히 지나온 듯 온통 덜컹거리는 고난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잘 해내지 못한 것들이 군데군데 생각이 나 아쉽고 섭섭하기도 하네요. 맨 꼴찌로 겨우겨우 완주(完走)한 사람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가슴에 뭉친 후회가 터져 나오는지 크게 긴 한숨이 쉬어지는군요. 이 모든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어요.
-주 5회 소설 연재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재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매사 재주 없고 요량 없는 인간이라 저에게는 이 세상 먹고살기가 갑절이나 힘들어서 오만 잡사 궂은일만 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에게 닥치는 고통이 삼재팔란(三災八難)이라 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고난들이 한 번도 저를 비켜 가지 않았어요. 소중한 자식이 물에 빠져 죽고(水災), 집에 큰불이 나고(火災), 몇 푼 없는 살림에 크게 사기를 당해 거액의 돈을 뜯겨 망하고(風災), 밥 먹듯이 채이고, 무시당하고, 이별 당하고 사람으로 태어나 지상에서 겪을 모든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육십에야 친구에게 배운 기술이 용접인데, 그때 크게 후회가 되더군요. 용접을 배워 일을 해보니 아주 재미가 있었어요. 불을 갖다 대면 쇠가 붙어버리고 또 불을 그어 버리면 쇠가 끊어지고 제 적성에 아주 잘 맞더라고요. 일찍이 용접기술을 배워 익혔더라면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을 건사했을 텐데 평생 돈이 안 될 이 원수 놈의 글을 배워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고 보니 부모에 불효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그렇다고 다른 길도 가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살았구나 하는 깊은 후회가 일었지요.
십여 년 전에 서울에서 완전히 망하고 거지가 되어 고향에 돌아와 비명에 아버지를 억울하게 여의고, 아버지가 남기고 간 남의 논 몇 마지기 농사를 지으면서 엉겁결에 농민이 되었지요. 농민이 되고 보니 돈은 안되어도 마음은 참 편했어요. 매일 비가 올까 날이 맑을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직업이 농민이더군요. 농민으로 못 먹고 사니 예전 작은 밭 자락에 작은 식당을 지어 요리사가 되었지요. 집 앞에 작은 논이 있어, 거기에는 복숭아를 심고 닭을 길러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지요. 그런 바쁜 시간에 하루에 두세 시간을 할애하여 재주 없는 놈이 원고를 매일 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더군요. 먹고 살기 위하여 농사에 요리사에 과수원 일에 닭 기르는 일이 주업인데, 어느새 연재소설 쓰는 일이 매일 하는 의무적인 취미생활이 되어버렸지요.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일은 연재소설 글 안에 매일 들어가는 삽화였지요. 처음에는 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에게 그림값을 줘서 삽화를 넣었는데, 그 화가들이 그림값을 올려서 요구하니 삽화를 넣을 수가 없었지요. 아무도 세상에 자기 재주를 그냥 주는 사람은 없더군요.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기희생과 봉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했지요.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과연 인간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없더군요. 모든 사람이 오래전에 돈의 종속물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구나! 돈과 재주! 돈에 팔리는 재주! 가진 재주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아무도 그 재주를 이 세상을 향해 헐값에 공으로 내놓으려 하지 않더군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원동력은 오로지 돈이더군요. 처참했지요. 그래서 자체 해결하는 이중고를 겪었지요. 내가 괜한 일을 하였구나! 하고 그때 깊이깊이 절망했지요!
-수많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설화와 전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수집하게 됐으며,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하게된 노하우 또는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지.
▶20대 말 군사독재 시절 제도권에 들어가 세상일과 무관하게 나만 혼자 안정되고 기름진 편한 밥 벌어먹는 것은, 왠지 죄악이라 여겼던 그 어지러운 난세(亂世)에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나만의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까? 고민하며 우연히 천불천탑 화순 운주사에 갔던 적이 있어요. 거기서 전설을 들려주는 앞마을 노인이 있었는데, 그 구성진 이야기에 순간 매료되었지요. 어려운 경전을 읽을 수 없는 일반 농민 노예들에게 구성진 이야기를 통해 그 경전의 핵심을 관통해 깨닫게 해주는 성현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농사짓는 어머니가 품팔이한 돈으로 인쇄비를 담당하여 ‘운주사 그 신비로운 전설, 설화’라는 책을 처녀 출간했지요. 그런 계기로 광주 MBC 창사 33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천년의 신비 운주사’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이 땅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전설과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후 운주사 전설을 다시 재편집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을 재출간하였고, 또 전국의 미륵 도량을 돌면서 당시 일을 맡긴 스님에게 지금까지 원고료도 받지 못한 ‘재미있는 미륵 이야기 상하’도 출간하게 되었지요.
주로 정리된 문헌 자료를 수집하거나 현장에 직접 가서 인근 마을의 노인분들에게 채록한 이야기들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작품을 창작했지요. 선인들이 남긴 옛이야기의 깊은 지혜를 헤아려 알기란 내 재주로는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을 내 나름대로 깨달아 알고, 이야기를 새로 재구성해 만드는 일이 참 재미있었어요. 옛날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어른들 말이 정말 딱 맞아떨어진 셈이 되고 말았는데, 재주 좋아 누구처럼 일찍이 세상에 문명(文名)을 떨쳤더라면 명리와 돈과 권력과 안락한 삶을 얻었으련만 그것은 저와 멀었지요. 이름 없이 밑바닥에 살았기에 우리 조상들의 버려진 옛이야기를 만나게 된 셈이었는데, 어찌 보면 그것이 참 행운이었지요. 전국을 돌며 이야기 자료를 수집하고 산골짜기 노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며, 옛이야기의 현장을 답사한 기쁨은 돈과는 멀었지만 제게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요.

-지난 5년간 총 10화에 걸친 에피소드를 연재했다. 원작자로써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유튜브를 보는데 어느 날 ‘기생 소백주’ 작품을 누가 가져갔더군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에도 퍼갔더군요. 유튜브 무단 게재는 원작자로서 저지시켰는데, 여기저기 퍼간 것은 그냥 두었지요. 옛이야기가 좋아서 가져갔는데 일일이 간섭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지요.
농사일은 바쁘고, 식당에 손님이 와서 음식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원고 마감 시간은 닥쳐오고 술까지 퍼마신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내 글을 기다리고 있을 독자재현들 생각이 났지요. 10분, 20분에 번갯불에 콩 볶아먹기 식으로 겨우 짬을 내서 서둘러 원고를 쓰고 삽화를 마감하여 급하게 보냈던 적이 참 많았지요. 다음날 글을 보면 문맥도 어긋난 곳이 있고, 심지어 맞춤법도 틀린 곳이, 여러 군데 보였지요. 일은 많은데 게으른 놈이 절대로 할 일이 아닌데…먹고 살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원고에만 집중할 시간이 없는 것이 참 아쉬웠어요. 더 잘 쓸 수 있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 숨 막힌 순간들을 견뎌냈는지 아찔하네요.
-앞으로 또다른 창작 계획은.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 이런 것 말고 꼭 써서 남기고 싶은 소중한 옛이야기들이 아직 여러 편 남아있군요. 우리 역사에 훌륭한 조상님들의 옛이야기를 써서 남기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알고 누가 알아주나, 알아주지 않으나 여유가 생기면 평생 열심히 쓰고 싶군요. 또한 지금까지 썼던 글을 출판해서 후손들을 위한 기록으로 남기고도 싶고, 그리고 중국에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의 고대소설이란 제목으로 출판할 나름의 계획이 있긴 하네요. 그래서 열심히 지금 인쇄할 돈을 벌고 있지요. 그런데 돈 버는 일이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로군요. 끝끝내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뜻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요!
-그동안 소설 야설천하를 사랑해주신 남도일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부탁드린다.
▶별것도 아닌 하찮은 사람이 서툴게 쓴 글을 혹여 재미있게 기다려 읽어주신 독자재현이 있었다면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려요.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기다려 정성껏 읽어주신 분이 있었다면, 그분의 기다림 때문으로 제가 힘을 얻어 글을 쓴 최고의 동력이 되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우리 옛이야기를 접하고 느낀 점은 유대인의 탈무드나 여타 다른 민족들의 조상이 남긴 유명한 이야기에 견주어 우리 조상들의 옛이야기와 선인들의 지혜가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하네요. 작금의 시대가 서방의 과학 문명과 서방의 정치 제도와 종교, 경제 자본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해서 인류의 보편 선(善)을 지향하는 정신세계가 인간주의가 우리보다 결코 뛰어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모자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 절대로 잊지 말기 부탁드리네요.
그리고 혹여, 죽을 만큼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사시기를 바라네요. 저같이 온갖 고난과 고통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 돈이 전혀 아니 되는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죽고 싶은 마음 붙들어 안고 근근이 살아왔지 않나요. 따지고 보면 돈과 권력과 지위와 명리를 다 움켜쥐었다고 높이 앉아 도시고 까부는 아침저녁으로 천지만방(天地萬方)에 얼굴 내밀고 이름 떨치며 살아가는 빛나는 그들이 절대로 인생의 승자가 아니지요. 겉은 형편없이 초라하고 밥 끓일 것이 없이, 버림받아 혼자가 되어 가난하게 살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인생길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 선인들의 옛이야기 속에서 깨우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조상이 지닌 위대한 선비사상이었지요. 돈에도 권력에도 폭력에도, 천하가 흔들린 대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정신, 그 선비사상을 복원하는 것이 제 글쓰기 작업의 전부이지요. 우리 사회에 그 선비사상을 올바로 복원해야 우리가 가진 이 모든 사회적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나 싶어요. 동양이 남긴 위대한 선비정신은 어디에도 없고 서방으로부터 배워온 서방의 정신과 문명에 빠진 능력 많고 욕심 많은 고급 기술자들만 와글와글 무한경쟁 속에서 득실거리는 이놈 세상이기에 온갖 문제가 터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끝으로 1943년 태평양전쟁 시절 일제 강점기 흉년에 공출 못 내겠다고 일인에게 동양척식회사 마을 담당자 대신 말하러 갔다가 두들겨 맞아 죽게 된 할아버지 때문에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 되어 일만 하며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 돈 못 버는 자식 둔 탓으로 ‘평생 나는 농사만 짓다 죽는구나!’라고 말했던 비명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죄 없는 아버지, 농사일에 날품팔이로 살다가 병이 들어 끝내 임종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께 지난 오 년의 졸작을 바치는 일로 평생 돈벌이 한번 하지 못해서 고운 옷 한 벌, 맛난 고기 한번, 따뜻한 말 한번 해드리지 못한 못난 자식의 깊은 불효를 빕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의 고귀한 글을 싣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신 남도일보사 그리고 제 글을 편집 담당해 주신 김우관 전 편집국장님과 정희윤 기자님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편, 전남 나주 출신인 강형구 작가는 전설과 설화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수년간 직접 취재해 소설형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독자에게 선보여 왔다.
그는 2014년부터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옆 연못가에 등월루를 짓고 은거하며 전설 창작과 함께 소설 및 여러 문학작품을 게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운주사 그 신비로운 전설과 설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 ‘재미있는 미륵이야기 상·하’ 등이 있다.
또한 광주 MBC 창사 33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천년의 신비 운주사’ 구성, KBS 뷰티플 코리아 ‘운주사 천년의 신비’ ‘전국은 지금’ KBS 2, 뿌리 깊은 나무 ‘한국의 탑이야기’ KBS 코리아 ‘에니멘터리 한국설화’ 2회, SBS 모닝와이드, KOREA/JAPAN 월드컵 브라질 국영 텔레비전 한국의 사찰 편 등에 다수 출연한 바 있다.
정리/정희윤 기자 star@namdo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