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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세평] FTA의 Win-Win 전략-강영태 지회장 최근들어 한·미 FTA를 둘러싼 이해집단간의 잡음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번 한·미FTA협상과 관련하여 가장 이슈화되고 있는 부분은 스크린쿼터이다.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영화산업의 한국시장 진출 확대를 위해 미국측은 우리나라의 스크린쿼터를 문제삼아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요구하고 있고, 우리정부도 미국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스크린쿼터를 축소할 계획이다. 이에 한국영화인들은 연일 일인시위와 함께 대정부투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개방에 따른 이해집단과 정부간의 충돌은 과거 한·칠레FTA에서도 농민과 정부간에 벌어졌고,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세계화시대에 시장규모가 협소하고, 부존자원이 부족하여 수출지향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우리상품을 외국에 지속적으로 수출하려면 우리도 외국상품을 수입해야 된다. 즉, 우리시장을 개방해야 된다. 한·칠레FTA협상에서는 우리의 농산물시장을 개방하고 중남미 진출의 거점인 칠레의 가전시장과 자동차시장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번 한·미FTA협상에서도 우리의 영화시장을 개방한 대신에 우리는 세계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에 우리의 주력상품인 자동차, 전자제품 등을 지속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한·중·일FTA도 조속히 추진해야 된다. 정부가 21세기 국가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는 동북아 비즈니스 국가건설의 핵심은 광양항과 부산항을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육성하여 우리나라를 동북아 물류중심국가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동북아 물류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대규모 항만개발 뿐만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FTA를 체결해야 된다. 한중일 FTA협상시에도 시장개방으로 인한 이해집단의 시장개방 반대투쟁은 벌어질 것이다. 즉, FTA협상을 둘러싼 이해집단과 정부의 마찰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고, 참여해야 되는 국제통상환경은 WTO로 대표되는 다자주의와 FTA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등에 의해 시장개방이 가속화되고 있다. 즉, 생존을 위해 시장개방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140개국이 넘는 WTO회원국중에서 FTA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나라는 대만 정도이다. 모든 나라들이 FTA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국제통상규범내에서 지속적인 무역확대를 위해서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FTA확대는 절실하다. 문제는 시장개방으로 피해를 입게되는 이해집단을 어떻게 설득하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대책들은 근시안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마저 잃었던 점이 문제이다. 따라서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야 될 일은 솔직함 속에 대국민합의를 이끌어 내야 된다. 또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이제 우리기업들도 FTA협정을 통해 확대된 세계시장에 당당히 진출하는 적극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된다. 협상은 이기고 지는데 목적이 있지않다. 훌륭한 협상은 서로간의 갈등을 인정하고, 갈등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서로가 양보하여 합의점을 찾아 모두가 Win-Win하는 것이다. 정부와 이해관계자 모두 국익이라는 거시적 측면에서 모두가 승리할 수 있도록 먼저 무엇을 얻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양보하여 합의를 도출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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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후보들의 ‘홀로서기’에 박수를 지난 3월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덕장(德將) 김인식 감독이다. 선수를 끝없이 신뢰하는 유연한 리더십으로 4강 신화를 일궈낸 그는 인터뷰에서 감독의 역할과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감독의 능력으로 진 경기를 이기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감독 때문에 다 이긴 경기가 뒤집히는 경우는 흔하다…” 스포츠 경기 가운데 야구만큼 불확실성이나 의외성이 큰 경기도 드물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야구에선 의외성이 크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순간적인 감독의 판단착오나 잘못된 의사결정은 다 이긴 경기를 뒤집어놓기 일쑤라는 것이다. 어디 야구만 그럴까. 선수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선거도 결코 이에 못하지 않다. 아무리 여론조사에서 앞서 나가도 언제 무슨 일이 터져 순식간에 표심이 뒤바뀌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의외성이 이처럼 야구와 같다면 감독의 기능과 역할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당 지도부의 능력으로 이미 진 선거를 이기게 하기는 어렵지만 그들 때문에 다 이긴 선거가 뒤집히는 경우는 흔하다고나 할까. 우연은 아니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이 지역의 상황이 묘하게 김 감독의 말을 연상케 하고 있다. 우선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그랬다. 감독격인 정동영 의장은 틈만 나면 광주·전남이 이번에 ‘봉기’해줄 것을 주문해왔다. 이 곳이 아니면 열린우리당을 회생시켜줄 지역이 없는 것처럼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다가다 툭 내던지는 정책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많다. 여수세계박람회의 남북공동개최도 그렇고 호남고속철의 정차역 증설도 그렇다. 하나같이 지역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면서 이 지역 여당후보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아예 한술 더 떴다. 느닷없이 ‘사과상자 폭탄’을 내던지는 바람에 모처럼 지지세를 불려가던 후보들을 ‘죽고 싶은 심정’으로까지 내몰았다. 오죽하면 박광태 광주시장후보가 “중앙당이 오히려 후보들의 경쟁력을 깎아내리고 있다”며 기가 막힌 심정을 기자회견에서 토로했겠는가. 이러한 사태는 결국 민주당이 앞서있던 정당지지도가 여야 보합세로 돌아서는 후폭풍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감독격인 한화갑 대표는 계속 경기를 지휘하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여야를 불문하고 후보나 예비후보들은 중앙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각개약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후보가 결함이 있거나 부족함이 있으면 밀어주고 도와줘야할 중앙당이 걸핏하면 후보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판이니 그들을 믿고 의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이런 현상엔 지방자치를 위해 그리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엿보인다. 후보들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각개약진’ 혹은 ‘홀로서기’를 감행하면서 ‘인물’로 유권자들 앞에 다가서는 긍정적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당선됐을 경우 중앙당의 입김은 현저히 줄어든다. 아무래도 이런 저런 낙하산 인사를 부탁하기도 멋쩍을 것이다. 특히 중앙의 논리로 지방의 현안을 재단하려는 시도에 단체장들이 보다 강력히 맞설 수도 있다. 굳이 감독들의 패착을 원한 것은 아니로되 결과적으로 지방선거가 지방선거답게 치러지는 계기가 주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철저히 인물위주의 선거가 치러지길 기대해도 나쁠 것은 없지 않나 싶다. 다소 분위기만 불리하게 돌아가도 당총재를 모셔오고 하룻밤을 재운다 길목에서 유세를 한번 더 주문한다 하며 북새통을 떠는 것보다는 자신의 정책과 인물로 승부를 내는 모습이 더 바람직스럽다. 그게 ‘홀로서기’에 나설 이 지역 후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칼럼
최혁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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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사람의 미덕, ‘배려와 감사’ 한강희 교수 5월은 유달리 사람살이와 관련된 기념일이 많은 달이다. 세상에 나서 유기적으로 관계를 이뤄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의 여정을 마감할 때까지 한 세상을 동반자로서 풍미하게 되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상기하며, 독려하라는 계절인 것이다. 사람이 여타 생물체에 비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린 연유는 짐작컨대 인간 고유의 고도의 이성인 ‘배려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월 속에는 인간 삶의 성장과 직결된 기념일이 다수 포함돼 있다. 1일은 ‘근로자의 날’, 5일은 ‘어린이 날’, 8일은 ‘어버이 날’, 15일은 ‘성년의 날’이자, ‘스승의 날’이며,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한편 이 지역만을 염두에 둔다면 ‘빛고을’의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 듯한 ‘민주화기념일’이 18일로 정해져 있다. 모든 사람은 어린이를 거쳐 성년에 이르고, 부부라는 ‘이성지합’을 만들어 둥우리를 틀게 되면, 어버이로 거듭난다. 성년이 되는 과정에서는 제도적 기제인 교육의 장 속에 삶의 부대조건인 사고와 실천을 인도하는 스승이 자리한다. 즉 사람살이란 ‘나’를 넘어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되며,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한데서 그 미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5월과 연관된 몇몇 기념일 만이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표현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삶에 접근하는 한 표상이 될 수 있고, 확대하자면 ‘성숙한 인격체’로 가는 지름길이라 호명할 수 있겠다. 인간 삶은 관계 속에서만 영속할 수 있고 가치를 발현할 수 있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은혜를 주고 받으며, 상호간에 세심하게 배려?감사해 한다면 ‘고통의 바다’인 세상이 다소간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갈애(渴愛)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무명(無明)이라는 답답함이 극복될 소지는 배려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멀리 있지도, 실천 또한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구체적인 매뉴얼로 작성될 때 실현되듯이 감사와 배려는 한 장의 이메일 서신으로 부쳐질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배려와 감사가 아니다. 학생들이 좋은 강의 분위기를 위해 수업시간 전에 칠판과 교탁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도, 운전 중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차가 나중에 가는 것도 배려다. 공적, 제도적인 것으로 시각을 확대해보자. 연전에 미국의 국립공원을 방문한 바 있는 데, 공사 중인 도로에 접근하기까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5백미터부터 50미터에 이르기까지 표지판이 대여섯 개 세워져 있었다. 구비구비 난코스임에도 불구하고 20~30미터 전방에 달랑 한개 정도 있는 우리하고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이른 바 ‘로드킬’을 최소화하고자 그들은 국립공원 주변에 목책 경계선을 설치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지리산 국립공원 주변 도로에서 연간 수백마리의 동물들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1월 일본의 삿포로에서는 연례적으로 열리는 ‘눈 축제’에 첫날만은 노약자와 어린이를 입장시켰다. ‘배려와 감사’는 돈을 좀 더 벌어서, 더 큰 위치에 있어야 실현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돈이나 명예로 살 수 없는 이상의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뿌리인 고독을 근간으로 결핍되고, 허기지고, 메마른 소외된 자들이다. 어쩌면 고독은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풍요로운 곳에, 가장 높은 곳에 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위 권력자, 재벌총수가 자살하는 경우나, 자살률 1위 국가가 스위스라는 통계는 이를 반증한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한 세파에 짓눌려 무시로 흔들리는 측은한 존재다. ‘나’ 아닌 ‘너’를 측은하게 여기는 데서 기원하는 ‘배려와 감사’의 마음은 ‘세상은 한 번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불씨를 당기는 풀무질이 될 수 있다. 오늘 마음이 가난한 자, 등촉 하나 다는 날이다. 온 누리 지혜와 자비 넘치게 하소서. ‘옴마니, 반메홈’
칼럼
남도일보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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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 녹음방초 승화시에 내가 좋아하는 문자 가운데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가 있다. 사실 나는 녹음방초 승화시를 믿는다. 내가 5월의 녹음방초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4월이 너무 화사하기 때문이다. 그 화사함을 이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치고 지는 꽃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다. 때로 배신감을 느낀다. 지금 나의 뜰 모란은 그 배신감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 조금도 그 빛을 덜지않고 자색 그대로 땅에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이 전쟁터를 연상시킨다. 나의 꽃다운 나이 스무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전쟁을 만난 사람이 어찌 나 뿐이랴 만은 나의 그 경험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불행한 것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4월을 믿지 않는다. 남이 봄을 기다리듯 나는 5월을 기다린다. 요즘같이 황사가 잦아도 그 5월에 나의 마음은 언제나 푸른빛으로 있다. 분명 뿌옇고 흐려도 나는 언제나 높고 푸른 하늘을 그린다. 그 마음이 산에 이르면 더할 말이 없다. 올라가는 길이 가팔라도 힘들지 않다. 걷는 걸음 곁에 신록은 무엇인가 알아들을 것 같은 속삭임이 있다. 그 속삭임이 나무 잎에서 내는 소리는 또 다르다. 더 발음이 분명하고 더 리듬이 느껴지고 꼭 무어라 화답하고 싶어진다. 산을 읽으면서 오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이 미흡하다. 그것은 요산요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사람을 산과 다르게 인식하는 개념인 것이다. 산은 읽는 것이 아니라 고락을 같이 하면서 같이 사는 나 자신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인봉에서 쉬고 약사암 삼거리를 지나 중머리 재로 향하기 위하여 전망대를 가는 오솔길에 들어섰는데 길가에서 어떤 분이 몸을 수그리고 무엇인가 캐고 있다. 들여다보았더니 산난을 캐고 있다. ‘아저씨 무엇 하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식물 채집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묻는 의도를 알았을 것이다. 비록 식물채집이라 하더라도 그 일은 잘못이다. 나는 더 이상 그분을 추궁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 자리를 지나가면서 다만 혼자서 몇 마디 불평섞인 발성을 남겼을 뿐이다. 지금껏 무등산 식물도감이 없을 리도 없고 설혹 없다하더라도 산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일은 안 된다. 나는 식물도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꽃의 사진과 자세한 소개 등 그 공들인 작업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꽃에 이름을 붙인 작업도 별로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꽃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꽃은 죽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이름 없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꽃이 이름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 꽃은 그 아름다움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실상 꽃 이름 외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거의 꽃 이름을 아는 것이 없다. 그러면 너는 식물학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식물학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식물학의 발달은 식물을 죽이는 데 기여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물학이 인간의 욕심을 위하여 발달해 왔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 문명 비평적인 세계관은 이미 낡은 관념에 불과하다. 인간을 벗어난 어떤 인식도 이미 오늘의 사상체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세기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한 사람들이 그것을 외쳤지만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문명에서 산 보람을 얻고 있다. 문명비평은 19세기 이래 서양의 그들이 그랬듯이 배부른 소리이거나 위선적인 외침에 불과하다. 우리는 문명으로 하여금 인간의 고귀함을 확인하고 있다. 인간의 사는 보람을 얻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있고 인간의 고귀함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왜 문명 비평적인 사고를 버리지 않고 있는가. 위선이 아닌가. 그 무서운 질문에 나는 버틸 이론도 할 말도 없다. 다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선문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칼럼
남도일보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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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논단]아버지의 추억-이낙연 원내대표(민주당 의원, 영광·함평) 저희 형제자매는 4남3녀 7남매입니다. 원래 아버지는 10남매를 낳으셨습니다. 중간에 셋을 잃으셨습니다. 그 10남매 가운데 5명이 ‘막둥이’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섯 번째 아이부터 ‘막둥이’라고 부르셨는데, 그런 ‘막둥이’가 다섯 명이 돼 버린 것입니다. 아이를 그만 낳으려는 아버지의 의지가 번번이 실패하셨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어린 저희들에게 닭 얘기를 수없이 하셨습니다. “저 닭을 봐라. 병아리가 아주 어렸을 때는 에미 닭이 이것저것 챙겨 먹여준다. 그러나 병아리가 조금 크면 에미 닭이 병아리를 쪼아서 쫓아낸다.” 저희들의 자립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말씀이었겠지요. 그러나 어린 저희들은 아버지의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무서워지곤 했습니다. 저희들을 키우기가 그만큼 힘드셨던 것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저를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원래 저는 셋째 아들이었으나 형 둘이 어려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제가 장남이 됐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교육시켜야겠다고 일찍부터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이런 매정한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사내는 공부 안 해도 다 먹고 살게 돼 있느니라. 그런데 너는 공부나 해야 먹고 살게 생겼으니 어쩔거나.”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갑자기 물으셨습니다. “애비가 너에게 학비를 보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네 친구가 너를 찾아와서 어려운 형편을 얘기했다. 그러면 너는 학비를 쪼개서 그 친구에게 주것냐?” 저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아부지가 이렇게 고생하셔서 보내주시는 돈을 어떻게 딴 데 쓴다요?” 아버지께서는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에이 이 자식아, 애비가 아무리 고생한다고 너까지 그래서야 쓰것냐? 너는 천상 공부나 해야 먹고 살것다.” 그러시면서 아버지는 과거의 경험을 얘기해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친구에는 박경원 전 내무장관의 형님 박상원씨가 계셨습니다. 박상원씨와 아버지는 늘 어울려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박상원씨는 일본 경찰을 때리셨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만주까지 도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1년쯤 만주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신의주에서 목포까지 가는 기차에서 심심풀이 삼아 화투를 치다 만주에서 어렵게 번 돈을 모두 날렸답니다. 빈손으로 목포에 내린 아버지는 목포상고에 다니던 박경원씨의 하숙집을 물어물어 찾아가셨습니다. 박경원씨는 아버지를 반갑게 맞으시며 어쩐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박경원씨는 “형님, 마침 집에서 학비가 왔는데 조금 쪼개서 드릴 테니 어머니 치마감이라도 사 가지고 가시오”하며 돈을 주시더랍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박경원씨의 얘기를 해주신 뜻을 저는 자라면서 점차 알게 됐습니다.
칼럼
남도일보
2006.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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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세평]문예회관과 시립예술단이 할 일-차영호 회장 얼마 전 연극 ‘격정만리’를 준비하던 김명곤 선배가 문화관광부 장관에 발탁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바 있다. 발탁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립극장장 재직시절, 책임경영체제를 정착시킨 성과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우리나라의 국공립예술기관들은 책임경영이나 자립을 앞세워 전문경영인 출신들을 앞다퉈 예술기관장으로 영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능력있는 예술 기관장들이 새로 취임함으로서 의욕적인 운영전략을 내놓고 있지만 너무 수익성에 치중해 극장의 설립목적이 흔들려, 이대로 가다가는 공공 공연장은 사라지고 상업극장이 되어버릴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상당부분을 국민세금에 의존하고 있는 국공립예술기관과 단체는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예술단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민을 위한 예술 서비스다. 최상의 공연콘텐츠를 시민의 극장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선사함으로서 문화 향수권을 누리게 해주는 공익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더불어 문화소외계층에도 예술을 접하게 해주는 공공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이들이 21세기 문화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점이다. 최근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젊은 예술 감독들에게 국공립단체를 맡겨 공연예술에 대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21세기의 문화는 수용자 중심으로 감동경영을 하지 않으면 대중의 관심을 끌 수가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자면 공연의 수준을 높여야 하고 창작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창작 활성화를 위해서는 창의력 갖춘 인재개발이 필요하고 그와 동시에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펼쳐 주어야 한다. 결국 재정의 융통성이 관건이지만, 한편이라도 잘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고 해외에도 내다 파는 종합적인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국공립 예술단체가 지금처럼 연간 몇 차례 공연으로 안주해서는 애꿎은 세금만 낭비하고 공연예술 전반에 별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실적은 별의미가 없다. 관객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었느냐가 첫째이고, 단체가 속한 지역의 공연예술의 수준을 얼마만큼 끌어 올렸는지가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공립 예술단체의 창작이 활성화 되면 구민회관이나 전국의 문예회관이 레퍼토리 빈곤으로 전전긍긍하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역의 문예회관과 예술단체들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야 하는가는 너무도 명백해졌다. 무엇보다도 문화시장이 커지고 문화욕구가 증대되는 21세기에 지자체의 문화정책이나 안목이 세계수준으로 맞춰져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더불어 문예회관은 기관장의 전문가영입을 비롯한 자구책마련에 앞장서야함은 물론이요, 예술단체 또한 급변하는 공연예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 놓을 수 있는 변화와 자기개발을 끊임없이 추구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되는 반목과 갈등에 대해서는 서울시 교향악단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다. 2005년 서울시향을 재단법인으로 독립시킨 서울시는 세계적 지휘자인 정명훈씨를 영입하여 전권을 위임했다. 말썽많고 시끄럽던 서울시향의 전단원을 오디션을 통해 체질을 개선함으로서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거듭남은 물론, 찾아가는 예술서비스를 개발하여 시민의 교향악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서울시향의 수준으로 개혁하려면 많은 예산과 운영전반의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어려움이 따를 것 이다. 하지만 한 단체씩이라도 서울시향식의 모델을 적용하여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적극적인 해결방식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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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5만 교통 경제인들이 뭉쳤다는데… 이 지역 교통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인들이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름하여 ‘광주시 교통경제인단체 협의회’다. 지난주 목요일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런데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광주 시내 14개 단체에 회원사만 1만여개다. 회원수는 5만명이나 된다. 버스, 택시, 화물차 업체에서부터 차량매매, 폐차, 정비업소 등이 총망라되다보니 그렇다. ‘시민의 발’이나 지역의 물자수송을 영리의 대상으로 삼는 기업이나 직업인이 이렇듯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곧 그만큼 우리 일상에서 ‘교통’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그런 그들이 한데 뭉쳤으니 그 파괴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집결했을까. 사회가 분업화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각종 이익단체나 압력단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 선거철이다보니 자칫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하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우연한 기회로 창립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필자가 보기에 우선 정치색부터가 철저히 배제돼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지대한 반면 그들을 한데 아우를 아젠다나 연결채널들이 부족했던 게 창립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를 조정래 회장은 교통관련 업계의 위상정립 및 교통경제인 명예회복, 그리고 지역사회발전과 기업의 사회적 책무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지금 광주의 교통난은 서울이나 수도권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교통지옥의 면모를 슬슬 드러내기 시작하는 모양새다. 인구 140만 여명의 광주에는 현재 자동차가 대략 44만대쯤 굴러 다닌다. 그 중 승용차가 32만대다. 하루 통행량이 180만명 정도 되는데 자가용의 교통수송 분담율이 거의 27%에 육박한다. 도로점유율은 더 심하다. 작년 기준으로 승용차의 그것은 무려 70%에 가깝다. 택시는 8%, 버스는 9%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대중교통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도시 교통구조가 이렇듯 기형적이다보니 교통효율성은 지극히 열악하다. 시내 곳곳에서 당연히 체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시민들은 예전과 달리 움직이는 게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아무리 ‘나홀로 차량’을 없애자고 해도 말이 안 먹힌다. 요즘에 와선 기름값도 만만치 않는데 자가용들은 별로 위축되는 모습들이 아니다. 시민의식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이토록 힘들다. 당국에선 교통문제를 정책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교통정책은 넓은 의미에서 각종 교통시설을 어떻게 정비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느 시설에 우선 순위를 둬야 하는가를 재량하는 투자의 문제다. 또 어느 정도의 운임이나 요금으로 이용하게 하는가도 판단의 대상이다. 교통 전체의 본연의 자세를 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정책이 명멸했음에도 교통문제는 여전히 고통으로 남아있다. 심지어 학계에선 그 이름도 생소한 교통경제학이 생겼다. 이른바 사람이나 물량의 이동, 즉 교통 현상에 대한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분석 및 정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에 따르면 교통이란 거리(距離)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분업이 진행되면 사람이나 물자의 이동이 촉진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교통이 발달하면 이게 오히려 분업을 재촉하고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사람이나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자 대가를 받고 이들의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생겨났다. 바로 교통산업(운수업)이다. 교통경제인들이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통산업의 주체이자 현장 전문가인 그들이 교통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어떤 대안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구성원이 5만명이면 4인 가족 기준으로 20만명의 모임이다. 광주 인구 7분의 1이다. 이렇게 큰 조직은 드물다. 그만큼 권리보다는 의무를, 로비보다는 희생을 앞세워야 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광주가 선진 교통문화의 모델이 됐으면 한다.
칼럼
최혁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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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대중교통으로 여유 찾으시죠”-정형택 회장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모처럼 고향엘 갔습니다.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거리에 고향을 두고도 자주 찾지 못하다가 찾은 고향 길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의논한 끝에 이번 만큼은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로 하고 간단한 차림으로 나섰습니다. 늘상 승용차로만 다니다가 오랜만에 군내버스를 타는 기분은 홀가분하면서도 여유가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출발 때에도 승객이 적어 저마다 한켠씩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간혹 가다가 버스가 정차하기도 했습니다만 오르고 내리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어디 이렇게 여유로운 버스 여행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자가용 시대가 오고 보니 새삼 그 붐비던 지난날이 떠올라서 나는 아빠로서 그 시절의 복잡했던 생활을 이야기하느라 입술이 말랐지만 아이들은 그저 시큰둥하였습니다. 복잡한 지난날을 이야기해서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었습니다. 순간 ‘이것이 바로 세대차이구나’라는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내려서 털털거리는 군내버스도 타보고 짧은 거리지만 논두렁을 걸어서 촉촉한 풀 길도 걸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승용차로만 다녔던 탓으로 이런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에게도 공감이 갔던지, 웃으며 장난치며 좁았지만 함께 하는 모습이 정말 좋다고 몇 번이고 되뇌이며 말했습니다. 흙먼지가 묻어서 옷이 더러워지고 신발이 불편했으나 돌아오는 길은 넉넉한 여유였습니다. 운전에 신경쓸 일도 없으며 안전벨트니, 신호등이니, 음주운전이니 다 털어 버리고 버스기사님의 안전운행에만 마음을 기대고 가던 고향길, 돌아오던 고향길 정말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누구한테라도 이 여유로움을 한 번 권해보고 싶습니다. 버스창가에 기대고 눈도 붙여보고 긴 하품도 해보고 못했던 생각도 해보니 깊은 생각에 젖어 철학적 생각도 넘쳐났습니다. 그처럼 홀가분하고 여유로움을 혼자만이 만끽한다는 것은 왠지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색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버스여행을 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선 내가 여유로워지고 내 가족과 함께 그 여유로움을 펼치기도 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다소나마 교통난에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내 차 한 대쯤이야 하는 생각이 모여지면 고속도로가 막히고, 막히면 급해지고 급해지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승용차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던 아이들이 다음에도 그렇게 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오늘의 고향 길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생전 빈손으로 다니던 나들이 길이었는데도 고향에서 싸준 상추며 시금치, 고사리며 여러 가지 푸성귀들을 조그만 비닐봉지에 싸들고 다 성장해버린 아들과 딸들을 앞세우고 아내와 걷던 자운영 활짝 핀 논두렁을 빠져나오니 젊은 날이 회상되기도 했습니다. 정말 바쁜 일상 속에서 승용차로만 다니면 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으니 고향 길, 처가 길, 친척 길을 갈 때에도 조금 불편을 감내하고 대중교통으로 여유롭게 즐기는 생활문화를 이룩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는 마음의 준비에서 제 작은 나들이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자동차의 매연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되집어볼 때 대중교통 이용은 한번쯤 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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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시론] 신한류의 방향과 문화수도의 가능성-한강희 교수 지난 주 칼럼을 접한 몇몇 독자에게서 문화수도가 추구해야 할 ‘신한류의 방향’이, ‘네오르네상스’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명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진행과정에서 한계와 난점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제한된 지면에 어쭙잖은 관견(管見)을 미주알고주알 적시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어, 비교적 최근의 관심과 성과를 소략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겠다. 잘 알다시피 새 세기 들어 영화, 드라마, 컴퓨터게임 등 문화산업을 중심으로 국가 이미지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는 ‘한류열풍’은 중국, 홍콩, 일본,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를 넘어 이집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미국,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최근 한국의 사계를 시리즈 타이틀로 삼은 한 방송사의 ‘봄의 왈츠’는 이미 흥행에 성공한 ‘가을동화’, ‘여름향기’, ‘겨울연가’의 성과에 힘입은 것으로, 기획 시점부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캐나다 유관 부서에서 제작지원에 나섰고, 실제로 해외 첫 로케이션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실행하기도 했다. 이 계절 연작이 큰 호응을 얻었던 이유를 문화이론가 노트롭 프라이(Notrop Frye)의 원형-신화비평론에 기대어 증명한 시도도 있었다. 작품 내적 담론분석에 의하면 ‘여름의 뮈토스 로만스-가을의 뮈토스 비극-겨울의 뮈토스 아이러니-봄의 뮈토스 희극’ 순환구조라는 서사전략에 입각해, 인류 보편의 아키타이프(Archetype)이자 미적 형식에 주목한 결과라고 파악한 것이다. 즉 한류는 인류문화의 보편적 심성이 스며 있는, 한국에서 만들어낸 인류사적 원형의 서사라는 판단이다. 한국 특유의 문화적 감수성인 한류가 세계 문화의 보편적 감수성으로 자리하고, 기존의 일방적 수용과 소비에서 문화창조와 수출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그 골자를 요약하면 아시아적 감수성과 가치, 기존 제작 문법이 보여준 폭력성과 선정성과는 다른 유교정서로 순화된 세련성, 미국-일본 위주의 문화 선진국에 대한 혐오 정서 등이 거명된다. 이미 한류를 통해 한국적 감수성이 글로벌 문화혁명의 주류에 편입했다면, 문제는 이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인류문화 창달에까지 기여하는가에 있다. 한류가 민족적 정체성을 넘어 아시아적 가치를 창출하고 인류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14~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펼쳐진 르네상스(인문주의)에 상응하는 ‘새 세기 문화부흥운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많은 학자들은 일방적인 주류 중심과 권위적 위계질서를 털어내고, 물질문명과 천민자본의 만능을 경계하며, 배타와 패권을 걷어내고 상생의 생명가치를 구현하는 대안 문화운동으로 성숙시키자는 좌표를 설정한다. 정치논리와 경제논리를 삶의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웠던 지난 시절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생명가치 회복이라는 생명 및 문화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자면 경쟁력 있는 대중문화콘텐츠를 전략적으로 양산하여 국가 인바운드(In-bound)는 물론 국가 이미지를 확산하고, 한류를 아시아 권역 문화교류의 매개항으로 삼아 미주권이나 유럽공동체(EU)에 버금간 ‘아시아적 문화공동체’로 승화하자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 위주의 거대한 문화장벽을 허물 수 있는 문화블록을 조성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주변국, 문화수입국의 전근대적 문화 패턴을 털어내고 우리 특유의 감수성과 정서를 인류가 구원해마지 않는 항보편의 정서를 유발하는 콘텐츠로 만들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중심국, 문화수출국으로서 위상을 확대해나자는 것이다. 이제 ‘한류’는 ‘현상과 열풍’의 창업(創業) 시점을 지나, ‘분석과 해석’의 수성(守成) 차원을 넘어, 콘텐츠의 기획과 실행이라는 ‘경장(更張)단계’에 진입해 있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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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 잃어버린 지성의 시대 현관을 나서면 나의 작은 뜰 한 쪽에 서편으로 철을 만나 눈에 띄게 우거진 모란 숲이 있다. 모란 숲이라 말한 것은 나의 소망이 들어있는 다소 과장된 표현같지만 뜰 규모로 보나 그 우거진 기세로 보나 나의 마음을 차지하는 가득함으로 보나 숲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숲에 일어나는 현상에서 요 며칠 나는 먼 남태평양 화산의 폭발을 본다. 모란이 피고 있는 것이다. 진홍보다 더 화사한 자색의 꽃이 피는 현상에서 나는 지구의 새로운 시작 같은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들어온 지 근 50년이 되고 있다. 대학을 마치고 50년대 말 대학 때문에 중단했던 교원생활을 목포에서 다시 시작했다가 지금 교육대학인 사범학교로 옮기면서 나는 학교 가까운 곳인 지금 그 자리에 정착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정착한 그 50년을 같이 한 것이 많다. 집도 집이지만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고 손자들도 거기서 얻었다. 그 가족들과 같이 한 쪽에 모란이 있는 것이다. 나이 들면 가족에게 더 관심이 가듯 나이 들면서 나는 모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상에 따라 이쪽으로 밀리고 저쪽으로 밀리는 가족처럼 그동안 나의 모란은 나의 생애와 같이 파란이 많았다. 나의 뜰에 모란이 피기 시작한 것은 나의 눈에 나의 뜰이 들어오기 시각하면서다. 나의 뜰이 나의 눈에 든 것은 이 집에서 내가 죽는 날까지 살 생각을 굳히게 되면서부터다. 그러기 전까지 모란은 꽃을 피워도 모란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뜰을 정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뜰과 정원이 다른 것은 뜰은 그 공간을 같이 쓰면서 사는 사람의 뜻 보다는 나무나 꽃이 더 자연의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공간을 말하고, 정원은 나무나 꽃이 자연 보다는 사람의 뜻으로 배치되는 공간을 말한다. 나의 뜰은 나의 뜻이 반영된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뜰은 그들이 제멋대로 살다가 그 위치대로 정이 든 공간에 불과하다. 그 정을 모란도 하나의 역할을 꽃으로 피우면서 나를 다가세웠다. 예년에 비하여 모란이 한 열흘은 앞서 피고 있는 듯하다. 여느 때 같으면 5월이 시작한 전 후에 핀다. 그 것은 영랑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모란이 아직 4월이 한창인 시간에 피는 까닭은 지구 온난화 때문일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나의 뜰에 피는 모란에까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먼 북극에 빙산이 녹는 현상이 나의 뜰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니 모란꽃이 안쓰럽다. 헤밍웨이 생각도 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묻지 말라. 종은 너를 위하여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인도양의 쓰나미도 파키스탄의 지진도 나의 뜰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모란을 보면서 내가 세계의 지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많이 위선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위선보다는 오히려 거짓에 가깝다. 내가 아니어도 세계를 걱정하는 훌륭한 사람은 많다. 북극의 빙산을 걱정하는 과학자, 오존층의 파괴를 걱정한 사회학자, 대기의 오염을 걱정한 정치가들, 그들에 비하면 나의 걱정은 달팽이가 산성비를 만나 움츠리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참새가 황사를 만나 부리에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달팽이의 느낌이 그 참새의 불편이 달팽이를 죽이고 참새를 죽이고 나를 죽인다고 생각하면 나의 걱정이 결코 거짓이나 위선이 아니다. 최근 수전 손탁의 에세이 ‘강조해야 할 것’을 번역으로 읽었다. 그는 21세기 대표적인 지성으로 감수성의 새로운 사제라 불린다. 그가 오늘의 지성들을 너무 이기적이고 냉소적이고 너무 비겁하다고 누누이 말한 것은 백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사실상 한국에서 보더라도 오늘의 지성들은 돈과 사사로움에 너무 종속적이다. 그들은 너무 많이 걸치고 소유하고 있다. 모란 앞에서 ‘잃어버린 지성의 시대’를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헛소리인가.
칼럼
남도일보
2006.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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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파일] 고전 ‘탈무드’가 필요한 시대-김선기 문화체육부장 ‘탈무드’라는 책이 한껏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7080세대라면 이 책에 대한 향수는 더욱 진하게 다가올 것이다. 친구나 이성간의 대화에서도 으레 등장하는 게 ‘탈무드’였다. 그 당시 ‘탈무드’를 읽지 않으면 친구들과의 대화 단절은 물론이거니와 시쳇말로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으니, 이 책에 대한 위력과 열풍은 가히 짐작할만 하다. ‘위대한 연구’라는 의미의 ‘탈무드’는 나라 잃은 유태 민족들에게 5천년에 걸쳐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이 책은 곧 그들의 경전이요, 생활규범이었다. 이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사회 지도층과 저명 인사, 위정자들에게 ‘당신이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 무엇이냐’라 고 물으면, 열 명 중 예닐곱은 곧잘 ‘탈무드’를 추켜들곤 한다. 그 만큼 이 책은 뿌리째 뽑혀가는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주는 큰 버팀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탈무드’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책이다. 굳이 책 속에 담긴 의미를 오늘에 다시 되새기는데는 이유가 있다. 5·31지방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예비후보자들 사이에선 온갖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는 더욱 심각하다. 모두 생각없이 내뱉어진 말들 때문이다. ‘탈무드’를 넘기다보면 ‘혀(舌)’에 대한 흥미있는 귀절이 등장하다. 설명 하자면 이렇다. 한 장삿꾼이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을 사라”며 온 거리를 외치고 다녔다. 남 보다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갈망하는 게 인간의 욕망 인지라, ‘인생의 비결’을 판다는 장삿꾼의 말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는 “값은 얼마든지 처 줄테니 그 ‘비결’을 나에게 팔아라’며 애원하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 장삿꾼의 뒷주머니에 은밀하게 돈까지 찔러주며 ‘뒷거래(?)’를 종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장삿꾼은 자신을 에워싼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비결은 자신의 혀를 신중하게 사용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왁자지껄 하던 주변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기를 쓰고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각 진영마다 선거를 임하는 각오가 대단하다. 선거판에서 2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1등만이 존재 가치가 있기에 비장함이 뒤따르는 건 당연하다. 여기에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상호 비방까지 버무려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흡사 ‘도깨비 시장’ 같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 원인은 모두 ‘혀(舌)’, 다시 말해 말(言)에서 연유하고 있다. 위정자들의 진흙탕 싸움에 나라 경제는 끝간데 없는 나락으로 함몰되고, 국민들은 정치에서 등을 돌린지 이미 오래이다. 정치는 혀로 하는 게 아니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서,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행동인지 고민하면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말에 대한 중요성은 굳이 ‘탈무드’까지 뒤적일 필요까지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혀(말)’에 대한 얘기가 수도 없이 많다.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빛을 갚는다’라 던지,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뱉어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등이 그것들이다. 이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삼가라는 뜻이다. 그 만큼 말에 대한 신중함과 중요성을 우리 조상들은 평소 강조했다. 4월의 목련이 정신없이 흐드러져야 할 이맘 때, 계절도 한국 정치를 닮아가는지 봄이 봄 같지 않고 아리송하기만 하다. 아직 멀고 먼 봄을 기다리기엔 숨이 차다. 다락방에 꽂혀있는 ‘탈무드’를 다시 읽고 싶은 이 저녁이 우울하다. /kimsg@
칼럼
남도일보
200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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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은 여름철 수영할때 물속에서 긴 풀에 다리를 휘감기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 풀이 잘피이며, 일명 진저리라고도 불린다. 잘피는 미역, 다시마 등 많은 해조류와는 달리, 꽃이 피고 잎과 뿌리 및 관다발 조직이 잘 발달돼 있는 고등 현화식물이다. 잘피류는 전 세계적으로 5과 13속 60여종이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연안에는 3속 8종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 ‘거머리말’이 전국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으며, 주로 조간대에 분포하는 ‘애기거머리말’과, 포기지어 분포하는 ‘포기거머리말’, 그리고 동해안의 얕은 수심에서 바위를 부착기질로 서식하는 ‘게바다말’과 ‘새우말’이 있다. 또 동해안의 비교적 깊은 수심에 분포하는 ‘왕거머리말’과 크기가 10m이상까지 자랄 수 있는 ‘수거머리말’이 있다. 이외에도 염분도가 비교적 낮은 강 하구에서만 발견되는 ‘줄말’이 있다. ‘거머리말’ 및 ‘줄말’을 제외한 나머지 6종은 우리나라와 일본 연안에서만 주로 서식한다. 잘피는 연안생태계 정화 및 종 다양성 보존을 위한 생태학적 기능과 서식처 및 산란장을 제공, 연안의 수산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성원이다. 또 잘피의 잎은 하구로부터 유입되는 질소 인과 같은 많은 오염물질들을 빠르게 흡수제거할 수 있고, 이산화탄소 저감효과를 가지고 있다. 지하경 및 뿌리조직은 퇴적물을 안정화시키며, 퇴적물 내의 중금속과 같은 오염물질들을 흡수제거 할 수 있다. 이렇게 연안 및 하구에서 수질정화와 생태계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잘피가 최근 10년 동안에 우리나라 연안에서 80%이상 사라졌다. 주된 원인은 난립한 매립과 무분별한 준설때문이다. 이는 잘피 생육지의 공간적 파괴와 밀집된 양식장, 정화되지 않은 생활 오·폐수의 무단방류로 인한 연안 오염심화와 높은 탁도에 의한 부족한 광합성 작용 등이 꼽힌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양식 산업 증산을 위한 해조류 연구는 매우 적극적으로 이뤄졌지만, 직접적 양식 대상이 아닌 잘피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는 매우 미미한 실정이고, 해양 수산 관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해 왔다. 하지만 최근들어 국립수산과학원과 일부 대학에서 잘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미 사라졌거나 크게 훼손된 잘피림 복원을 위해 잘피 분포지 파악과 생태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주변해역에 습지와 갯벌이 넓게 분포하는 남해수산연구소에서는 잘피가 훼손된 전남 화정면 제도에 1.0ha 이식을 통해 밀도증가가 1.5배 증가한 사실이 확인돼 이식사업은 성공적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잘피를 대량 종묘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중에 있어 대규모 잘피장 복원이 기대된다. 이러한 잘피의 이식 방법에는 잘피 씨앗을 대량 인공 종묘하는 방법과 성체를 직접 이식하는 방법이 있다. 성체이식은 잘피 개체를 이식틀에 활용하는 것과 철사로 퇴적물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 패각을 이용해 이식하는 방법 등이 있다. 아직 초보단계이기는 하지만 잘피묘의 대량생산과 잘피이식시 성공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유기질 바다비료를 이용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인공어초에 의한 해조장 조성의 경우 해조류의 이식은 3m이하의 수심에서 적절하나 외파에 의한 영향으로 시설물 유지관리 문제가 발생한다. 일반적인 종묘생산에 의한 방류의 경우 방류한 치어가 포식자에게 잡혀 먹힘으로써 생존율이 감소하고 남획에 의한 문제의 발생으로 종묘생산에 의한 방류 기능의 약화를 초래할수 있다. 이에따라 잘피를 이식해 치어방류 및 중간 육성장으로 이용하고, 어·패류의 산란장 및 자치어 보호 장소로 제공, 인공어초와 더불어 연안어초의 기능으로 수산생산성을 향상 시킬수 있는 잘피 생육지 보존 및 복원이 필요한 때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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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 기부의 미학(美學)-최웅일 주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돈을 내놓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조단위에서부터 몇천억 그리고 수억대에 이르기까지 액수도 다양하고 형태들도 각양각색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가 느닷없이 선순환을 시작한 게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 나라 지도층들이 대오각성한 나머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특권계층의 솔선수범)’를 다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지 행복한 고민마저 생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천만의 말씀이다. 돈이 오고간 경위들을 살펴보면 배신감마저 든다. 우선 선거철이다보니 케이크 상자나 사과상자에 담은 억대의 공천헌금들이 얼른 눈에 띈다. 이건 아예 논외의 대상이다. 일부 정치인들이 이걸 ‘기부’라고 생떼쓰는 걸 보면 역시 착각은 착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천헌금을 제 아무리 특별당비라고 포장을 해대도 범죄적 성격이 짙다보니 악취가 진동하기 일쑤다. 여기다 대고 기부의 미학(美學)을 언급해서야 죄 가운데서도 큰 죄다. 참여정부 들어서서 유달리 줄을 잇는 대기업들의 재산헌납도 얼른 봐서는 기부축에 드는 성 싶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제 아무리 액수가 많아도 썩 향기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불법행위 논란에 대한 속죄의 대가이다보니 오로지 떨떠름한 느낌뿐이다. 편법상속 시비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8천억원을 헌납한 삼성그룹이나 검찰수사와 관련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면서 1조원을 내놓은 현대차 그룹이 자발적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발전기금으로 1천억원을 내놓은 미국계 펀드 론스타도 마찬가지다. 5·16이나 5·18 직후 기업들에게 강제로 재산헌납각서를 쓰게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때보다 세련되고 글로벌화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 사회에 전혀 희망의 씨앗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기부자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장흥출신인 프로골퍼 위성미가 난치병 어린이들을 도와달라며 내놓은 3억원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수술을 받은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지난해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를 위해 50만달러를 쾌척한 적도 있다. 이 지역 출신 ‘국민여동생’ 문근영양도 지난번에 장학금을 내놓아 많은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이들을 보면서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은 기부의 미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만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의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지성에는 그리스인, 체력에는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에는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에는 카르타고인들보다 뒤떨어진 로마인들이 로마제국을 일궈낸 비결을 이렇게 꿰뚫는다. ‘상대를 포용해 동화시킨 관용과 개방성,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바로 ‘기부의 미학’으로 통한다. 로마의 귀족층들은 자리를 물러날 때 재산을 공공시설에 기부하거나 도로와 다리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등 스스로를 명예롭게 하며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우리 민족은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했다. 이는 요즘의 법체계보다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족을 달자면 요즘 우리 선거법이 문제다. 입후보 예정자는 도무지 어떤 기부행위도 하지 못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구호적 자선행위가 가능하기는 하나 통상의 범위를 벗어나선 안되게 돼 있다. 그러나 지방선거든 총선이든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뽑는 일이다. 차라리 평소 기부행위를 선택의 한가지 기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다. 공천권자에 가져다주느니 사회에 환원토록 제도화시킨다면 돈 공천 잡음도 줄어들지 않을까.
칼럼
최혁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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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영랑과 현구의 아름다운 문학적 가교-김선태 교수 ‘숨긴 눈물 호려 낼 듯/ 잠긴 설움 불러 낼 듯/ 실바람 호리호리/ 뒷산에 뻐꾹 울음// 임의 버림 못내 설워/ 걸음걸음 맺힌 한숨/ 복사꽃 피던 봄날/ 눈물 씻고 가시더니…(중략)…그대 생각 슬픈 언덕/복사꽃은 피었건만/눈물 어린 그 얼굴이/미칠 듯 그립건만. 김영랑(1902~1950)과 김현구(1903~1950) 두 시인은 광주·전남 현대시문학의 출발점이자 강진이 낳은 문학적 자랑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강진읍의 같은 집안(김해 김씨)에서 태어나, 1930년대 우리 시문학을 풍미했던 ‘시문학파’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줄곧 고향을 지키며 시를 쓰다가 같은 시기에 6·25의 참화로 세상을 뜬 운명적인 문학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영랑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문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긴 반면, 현구는 무욕적인 성격 등으로 인해 이름이 지워진 불운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아생전 두 분의 도타웠던 문학적 교류와 우정을 보여주는 시가 있어 주목된다. 현구가 사별한 첫 부인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영랑을 위해 쓴 조시 ‘M夫人의 追憶’이 그것이다. 영랑의 첫 부인 타계 직후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총 4연 16행으로 된 이 시는 ‘눈물’, ‘설움’, ‘울음’, ‘한숨’, ‘슬픔’, ‘그리움’ 등 비극적인 시어들이 동원돼 비애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영랑보다 두 살 위였던 첫 부인 김은하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1918년 동남아 일원에 창궐한 호열자에 전염되어 결혼한 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 영랑은 15세의 아직 어린 소년이었으며, 결혼과 동시에 휘문의숙에 다니기 위해 생이별을 하고 상경했었기 때문에 아내와의 애정도 미처 싹트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당시 아내를 잃은 그의 슬픔은 대단히 컸으며, 그 슬픔은 시 속에서 비애의식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필자는 이 시와 관련해 지난 2002년 강진문화원에서 펴낸 ‘김현구 시 전집’에서 각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첫 부인을 애도한 시라면 제목에 붙은 이니셜이 왜 ‘K’가 아니고 ‘M’일까 하는 학문을 하는 자로서의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당시 김현구의 차남인 김문배씨를 찾아가 물었더니 확실하진 않지만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첫 부인이 아니라 영랑이 서울에서 만나 아들 하나까지를 두었던 어느 여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필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으나 확실하게 검증된 것이 아니어서 이를 본문에 넣지 않고 참고삼아 각주로 처리한 적이 있다(단, 본문 안에서는 첫 부인으로 일관되게 해석했음은 물론이다). 최근에야 유족 측으로부터 강력한 항의와 함께 “M부인은 첫 부인의 애칭”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러나 비록 본문이 아니라 각주이기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일설로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지면을 빌어 정중하게 사과드린다. 영랑 탄생 104주년을 맞아 29일부터 5월 1일까지 ‘제1회 영랑문학제’가 영랑생가에서 열린다. 영랑의 시업을 기리기 위해 강진군이 지원하고 영랑기념사업회와 계간 ‘시와시학’이 공동 주관하는 영랑문학제는 영랑문학상 시상식을 비롯한 영랑문학 심포지엄, 시 낭송의 밤, 전국 백일장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영랑생가의 모란이 활짝 벙그는 시기에 맞춰 실시되는 이 행사는 앞으로 강진군민은 물론 경향 각지의 시인들이 다수 참여하여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제로 발돋움할 것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을 앞두고 ‘남도답사 1번지’ 강진을 찾아가 영랑문학제도 관람하면서 영랑과 현구 두 분의 살아생전 도타웠던 우정과 문학의 향기에 흠뻑 취해 볼 일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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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담론]‘신한류’의 거점, ‘문화중심도시’ 광주-한강희 교 지역민의 염원이자 참여정부의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광주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 ‘문화수도특별법’ 제정으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28일 여야 의원 1백57명이 발의,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이던 ‘특별법’이 4월중 국회 문광위와 법사위 회의를 거치게 되면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문화수도특별법’은 각 정파의 이해관계와 정치쟁점 등으로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지역민들의 열화 같은 요청과 참여정부의 지역 분권 특화 정책에 힘입어 여야가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환영할 만한 조치로 저간의 침체된 지역 분위기를 일신할 만한 청신호임이 분명하다. 특별법이 통과되더라도 특별회계 설치여부, 조세감면조항, 수익사업화 방향, 신설 주관부서 설치 등 주요 쟁점이 놓여있기는 하지만, 이는 머리를 맞대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문화중심도시’의 기획과 전략, 진행과 실천이 어떠해야 바람직한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 해답은 간략히 요약하자면 기획 당시의 초발심으로 되돌아가, ‘무엇을 진열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주목하는 일이다. ‘어떻게’라는 방법론적 사유가 풍요로울 때 기초가 탄탄해지고, 생명력까지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인문학의 ‘ABC‘에 속한다. ‘문화수도’, ‘문화중심도시’라는 어의와 지평이 문화예술을 필두로 한 인문학적 소통과 성찰의 원리에 기초해야 함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획단 위주의 일방통행식 입안과 결정을 지양하고 모든 영역에서 역동적이고 창발적인 에너지를 모으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살아 숨쉬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문화발전소’는 다양한 소통의 장치가 작동될 때 비로소 구현될 수 있다. 문화수도 조성 위원인데도 불구하고 사업이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와서는 곤란하다. 도시의 주인인 시민들의 성원과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지역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현안이자 국책 현안인 문화수도 조성과 관련된 문화관광위 소속 상임위원이 전무하고, 인기상임위인 건설교통위·산업자원위에 전전긍긍하는 현상은 이들이 진정한 선량인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본보 17일자 1면). 문화수도 기획단은 차제에 토론이라는 여과장치를 선용해야 한다. 시민, 학계, 문화예술인, 정치인, 공무원, 도시전문가가 공청회를 통해 난상토론을 하면 된다. 토론이라는 소통의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견을 조정하며, 비판적 사유와 분별력을 제공하는 등 시스템을 원활하게 하는 최적의 민주주의적 장치다. 우리 지역의 전 영역, 전 부문이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거르고 또 거르자. 이번 지방선거에서 활용되고 있는 매니페스토를 반면교사로 삼아 조성과 건설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깁고 또 메우자. 요컨대 ‘문화수도’ 기획의 초발심을 정치행정적 논리가 아닌, 개방과 소통을 제일의(第一義)로 하는 문화(동질성 모색) 논리 차원에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한편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점을 상기하면, 세계 여느 도시와는 다른 ‘문화 콘텐츠의 차별적 우위성 확보’를 주된 과제로 삼아야 한다. 파리와 런던에서 시행한, 도쿄와 상하이에 존재한 짝퉁이 되어선 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문화라는 수사만 내두르면 능사가 아닌 시대이기 때문에, 민족성·지역성이라는 항구여일한 유전자를 상품화하려는 고도의 기획과 전략이 요청된다. 이미 드라마, 영화, 에니메이션, 음악 등으로 ‘한류’를 양산한 만큼, 이런 패러다임과 담론을 ‘수용하면서 뛰어넘는’ 시너지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수도’, ‘문화중심도시’라는 브랜드네이밍은 이성적·철학적으로는 ‘신르네상스’를 지향할 때, 상품지향적으로는 ‘신한류(新韓流)‘의 기치를 내걸 때 지역이 세계로 다가설 만한 가치가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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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 짜잔한 남자로 사는 삶의 행복 동틀 무렵 먼저 나를 맞는 것은 참새소리다. 잠은 깼지만 아직 그대로 이불이 좋은 시간에 누워 그를 듣고 있을 때 참새 소리는 옆에 같이 자다가 먼저 일어나 응얼거리는 아기처럼 가까이 스킨십을 느낀다. 듣고 있으면 뜻을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이 단순하면서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같이 하는 공감이 있다. 새잎들이 듬성듬성 움직이고 있는 나의 뜰 은행나무 가지의 봄기운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줄기 사이에서 숨박꼭질하듯 연초록색으로 나직하게 속삭이는 담쟁이덩쿨 새순을 닮은 소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들의 발성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요즘 나는 새삼스럽게 흔하고 흔한 참새가 좋다. 느지막하게 철이 들어 나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는 모양이다. 더러 만나는 친구가 전화를 했었다면서 어제 어디 갔었느냐고 캐묻는다. 화순 온천 가는 아내를 모셨다고 하니까 즉각 ‘짜잔한 놈’ 하고 성토하였다. 그에게 그 정도가 짜잔하다니 만일 내가 아내 대신 찻잔도 씻고 접시도 닦고 설거지도 한다는 것을 고백하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졌다. 앞치마를 입을 때도 있다. 그의 말대로 형편없이 짜잔한 놈이 되어 버렸는데 그러나 그 짜잔한 짓이 고백이지만 사실은 불행한 느낌이 아닌 나의 마음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잘 알려진 가부장이다. 그 나이에 아직도 수입이 있고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재가(齋家)가 남다르고 주변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이시대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이 두드러지는 세상을 더없이 짜잔한 것으로 본다. 81년 봄 나는 미국에서 흥미 있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부인이 대학 교수인 그 사람의 하는 일은 집에서 살림하고 애기 보고 청소하고 잔디 깎고 빨래하는 일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인이 동료교수와 같이 차를 마실 무렵 그는 집안 청소를 한다. 부인이 공적인 일로 외출을 하다가 부득이 외식을 할 때도 서로 연락이 안 되면 일상대로 부인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한다. 내 친구의 말대로라면 그처럼 짜잔한 놈이 없다. 그러나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그가 자기 생활을 불행하게 생각하기는 커녕 매우 행복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소위 미국이 바로 세계라는 나라의 면목의 하나를 본 것이다. 며칠 전 한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조강지처를 버린 죄인’ 이었는데 서울 중앙법원의 전 부부관계 민사 재판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잘 나갈 때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새 여자와 파라다이스같이 살다가 IMF 로 거지가 되었는데, 한편 버림을 받은 여자는 이혼의 대가로 받은 시골 땅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거부가 되어 그 땅 반환소송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남녀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공정해진 이 시대에 여자에게 용기를 주는 상징적 에피소드다. 옛날 표준대로라면 이 시대는 분명 짜잔한 놈 천지다. 정년 한 내 친구 이 교수의 아내는 당당하게 연금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직접 관리한다. 그동안 보수 없이 자식 낳고 기르고 남편 시중했으니 그 무료 봉사의 대가로 연금을 압수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짜잔한 남자였던가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어떤가. 그들의 아내는 남자 중심의 입장에서 악처들의 예로 우리는 세뇌 받고 있다. 그러나 소트라테스와 톨스토이의 위대한 성취를 위하여 그 아내들이 결코 부정적이었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다. ‘연작(燕雀)이 어찌 봉황의 뜻을 알랴’ 공자의 말은 살아있는가. 이 시대는 연작이 실세이다. 연작처럼 짜잔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옛날의 고정관념은 이미 무너졌다. 이 시대는 봉황의 시대도 귀족의 시대도 가부장의 시대도 아니다. 더불어 사는 시대의 중심인 소위 짜잔한 남자의 삶은 이시대의 불가피한 생활양식이다. 아침에 참새 소리를 들으면서 깨달음같이 참새처럼 흔하고 짜잔하게 살다갈 남은 생애를 생각하였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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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논단] 이낙연 일기 - 아버지의 추억 -이낙연 의원 각 정당이 공천 파동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공천을 주는 쪽에서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개탄스럽습니다. 공천을 받으려는 쪽에서 죽기살기로 덤비는 것도 착잡합니다. 요즘의 공천 파동을 보면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4·19 혁명 직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우시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울음소리가 들리는 뒤안으로 갔습니다. 체격이 엄청나게 크신 아버지께서 상추밭에 엎드려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술을 꽤 드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흔들며 여쭈었습니다. “아부지, 어째 우신다요?” “이 놈아, 저리 가거라. 니가 뭣을 알 것냐?” 그래도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훌쩍거리며 아버지 곁을 지켰습니다. 한참을 우신 뒤에야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민주당 당원이셨습니다. 아주 열렬한 청년당원이셨습니다. 자유당 사람들이나 공무원들과 수없이 싸우시면서 민주당 국회의원의 당선을 세 차례나 도왔던 행동력 있는 청년당원이셨습니다. 4·19 혁명으로 민주당은 일약 집권여당이 됐습니다. 민주당 국회의원의 영향력도 훨씬 커졌겠지요. 그 민주당 국회의원이 아버지께 말씀하셨답니다. 농협 조합장을 시켜줄 테니 이력서 한 장만 써오라고요. 아버지는 이력서 용지를 사셨답니다. 그 용지에 이력을 쓰는데 쓸 게 없더랍니다. 학력도, 경력도, 그 무엇도 쓸 게 없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력서 용지를 찢어버리고 그 국회의원께 말씀을 드렸답니다. “나 같은 것을 조합장 시키면 안 돼요”라고요. 아버지는 국회의원께 그 말씀을 드리고 나서 술을 드셨답니다. 설움이 복받치더랍니다. 그래서 집에 얼른 오셔서 뒤안에 숨어서 우시다가 저에게 들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너는 가르칠란다. 그리 알아라.”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더러는 자질도 부족하면서 공천을 받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분들도 계시는 요즈음이라 아버지가 더욱 그립습니다. 저 자신도 공직에 나선 사람이고, 더 높은 공직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아버지가 더 더욱 그립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일까를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다시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고, 훨씬 많은 것을 아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먼 훗날 아들도 저를 그리워할까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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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세평] 행복의 조건은 나눔이다 오경교 사무국장 “크레모나의 조그만 병동을 생각하면 한없는 눈물이 다시 솟구쳐 오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오래된 화농과 지쳐서 핏기를 잃어 창백하고 흙빛인 얼굴로 가슴이 메어지게 하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가 그대로 놓아두려고 생각했던 팔이나 다리 등을 마지막 호의로서 잘라 달라는 시늉을 하며 우리에게 간청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절단 수술을 하였으나 결국 비통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우리는 아무도 도움을 못주고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장 앙리 뒤낭이 1859년 솔페리노 전쟁의 참상을 보고 쓴 ‘솔페리노 회상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저자가 전쟁의 당위성을 전제하고 글을 전개하였다는 점은 아쉽지만, 전쟁의 상황을 리얼리티를 살려 전시에 부상자를 치료할 조직적인 봉사원의 필요성을 알렸다는 점과 당시 체계없는 구호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살만하다. 적십자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뒤낭은 회고록을 통해 전시에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헌신적이고 자격있는 자원봉사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설치할 것과 전투능력을 상실한 상병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의료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조약을 제안하였고 1864년 ‘제네바협약’이 채택되면서 적십자 운동에 불씨가 당겨졌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창립되었고 자그마치 100년 동안 크고 작은 재해가 발생할 때 적십자 봉사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구호활동을 펼쳤다. 현재 적십자 운동은 각국의 실정에 맞게 전시 및 재해시 구호활동에 일익을 담당하고 평시에는 청소년적십자활동, 에이즈예방캠페인, 응급처치법보급, 수상인명구조활동, 북한이탈주민 정착도우미,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진료사업과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손가정과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어버이결연맺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들을 지속적으로 방문해 생필품 제공은 물론 반찬 만들어주기, 목욕시켜드리기, 말벗되어드리기 등 물질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 구호에도 힘쓰고 있다. 많은 분들이 적십자사의 역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이지만, 우리도 먹기 살기 어려운데 다른 나라 도와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냐”, “매년 모금을 시행하지만 모금된 돈은 모두 북한에 비료와 식량을 보내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북한에 구호물품을 보내고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된 사업은 통일부에서 지원하는 남북협력기금에서 마련되고 있다. 그 지역에서 모금된 적십자 회비는 고스란히 지역사회에 쓰여진다. 크고 작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리고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서 말이다. 1년에 한 번 모금하는 적십자 회비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매월 커피 한 잔 값을 아낀다면누군가에는 고통스러운 삶을 버텨낼 큰 용기가 된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재해로 힘들어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사전에 기금을 마련하고 이웃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되새겨보자. 티벳의 영적 지도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는 이 생을 사는 목적에 대해 “행복해지기 위한 것.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깊은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게 된다”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를 보살피는 마음, 즉 인간의 자비이다”고 말한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우리의 행복하게 하고, 그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전해준다. 나누면 나눌수록 행복과 기쁨은 배가 된다. 참 단순하면서도 묘한 공식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만은 않다. 많이 갖으려하기 때문에 ‘마음의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나눔’이다. 인간에 대한 배려와 애정. 바로 행복의 열쇠이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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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을 바라보며] 신중해야할 여수엑스포 공동개최 2002년 12월 3일 오후 모나코 그리말디 포럼. 이곳에서 날아든 패배의 소식에 이 지역 사람들은 평생 지워버릴 수 없는 허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날 제 132차 세계박람회기구(BIE) 총회는 2010년 세계박람회 개최도시로 여수 대신 상하이를 선택했다. 여수와 상하이의 최종 득표결과는 34대 54. 다섯표 이내의 접전이라며 조심스레 승리마저 꿈꾸었던 우리측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여수 현지는 일순 공황(恐慌)상태로 빠져들었다. 당시 박람회 유치희망에 부풀어 부동산값이 오르는 등 간만에 들떠 올랐던 지역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여수를 포함한 광주·전남 사람들은 알 수없는 박탈감에 몸을 떨었다. 물론 모든 경쟁이 항상 승리로 귀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후보지 경합에선 잘도 이기던 우리나라가 이 지역의 명운이 걸린 싸움에선 정작 힘도 못쓰고 패퇴했다는 사실이 영 개운치 않았었다. 그럼에도 여수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다시 2012년 해양엑스포 유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내년말 후보지 결정투표를 겨냥해 더더욱 분발중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북공동개최 얘기가 터져 나왔다. 지난 14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전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년중에 개최여부가 확정될 2012 여수엑스포의 남북 공동개최를 북한측에 제의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이다. 정의장은 이미 통일부장관과도 협의를 마쳤으며 21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제의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로드맵까지 내놓았다.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불거진 이 제의를 놓고 지금 이 지역에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과연 여수와 북측의 어느 도시가 꼭 공동개최를 해야할 실익은 있는 것인가, 또 북한은 공동개최를 수용할 태세가 돼있기나 한 것인가, 등등을 놓고 의론이 분분하다. 이러한 여러 복잡한 메커니즘에 대해 얼마나 치밀한 사전 검증을 거쳤는지도 의문이다. 당사자인 여수지역의 여론을 얼마나 알아봤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당장 민주당은 여수엑스포가 전남 동부지역의 인프라구축과 지역개발을 선도해야할 국책사업인데 공동개최가 본연의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번에도 주요 SOC가 부족해 ‘예고된 패배‘를 겪어야만 했는데 또 다시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 흐트러지면 승산이 있겠느냐는 논리다. 제 아무리 민족적 취지가 좋다고 해도 어설프게 추진했다간 ‘공동 개최‘가 아닌 실질상의 ‘분산 개최‘가 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여수와 북한에서 엑스포가 함께 열릴 경우 세계인의 관심은 당연히 북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여수는 그러찮아도 국제 인지도가 낮아 전전긍긍했었고 지금도 그 현상은 마찬가진다. 자칫하다간 이제껏 고생만 하고 정작 주인공 자리는 북측에 넘겨줘야만 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한다. 여건을 조성하는 과정에서도 ‘준비 안된‘ 북한을 지원하느라 여수는 서자취급 받기 십상이다. 국가재정에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속좁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나 엑스포에 거는 여수 및 전남 동부의 기대는 그만큼 처절하다. 여당은 이런 전후사정을 제대로 듣고 이 지역을 설득할 자신이 생길 때 공동개최를 거론했어야만 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터뜨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처음보다 재수(再修)가 더 힘들다는 것은 상식이다. 실패할 경우의 후유증은 더욱 심각하다. 그런데도 북한과의 공동개최가 유치에 얼마만큼 기여를 하게될 지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설득력있는 근거도 없이 한건주의식으로 들이미는 여당의 태도엔 기가 질린다. 여수엑스포는 이 지역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 흔한 공청회 한번 없이 무작정 던져놓은 돌멩이에 이 지역이 고통받고 신음하는 일이 없기를 간곡하게 바란다
칼럼
최혁
2006.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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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자식에게 상처되지 않는 말을… 정형택 회장 5월 가정의 달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각 매스컴에서는 가정과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소중함을 입이 마르도록 역설하곤 합니다. 가족들에 대한 소중함이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자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사고는 자칫 아이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멍을 들게 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어른들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해주었는데 라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끝없는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런 부모의 욕심과 간섭을 견디지 못해 방황하거나 가출까지도 하게 되는 것을 우리 어른들은 알아야 합니다. 포장된 사랑의 경우 대개 아이의 처지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욕심인데도 우리 어른들은 사랑으로만 알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를 해주면서 아이를 볶는 경우는 좀 낫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모로서 당연한 일을 해주었으니 1등을 해야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 판사가 되어야 한다’ 등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부모의 입장(욕심)에서만 말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귀가 아플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미리 두려워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당연한 욕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들의 심정과 이해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라 하지만 자식들에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강요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어른들의 한 마디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보탬도 될 수 있지만 자칫 빗나간 화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족 내에서도 큰 애와 작은 애가 얼마든지 서로 다를 수도 있는데도 잘한 쪽만 내세워 그렇게 되라고만 하니 형제간일망정 미움과 반목이 싹트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형제간의 정 보다는 내가 당하는 고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제발 가족 내에서라도 어떤 자식을 내세워 치켜올리거나 그렇게 되기를 비교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내에서도 요사이 그 흔한 말로 왕따가 생겨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거든 죽어버려라’했다가 중학교 2학년짜리 아이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는 정말 가슴 아픈 현실도 있었습니다. 죽어버리라는 부모의 말을 잘도 실천에 옮긴 자식이었지만 한 가정의 행복이 그로인해 무너지고 말았으니 무심코 부모의 욕심을 채우는 식의 말 한마디는 절대 금물이라는 것을 말해둡니다. 어느 누가 죽음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겠습니까마는 아직 부모와 어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에는 미흡한 아이들에게 함부로 내뱉는 말은 자식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거라, 공부를 잘해라’고 해도 싫은 것인데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거든 죽어버려라’했으니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로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이런 일 만큼은 없어야 될 텐데 현실적으로 멀어지고 있으니 세상을 더 산 우리 어른들이 좀 더 자제했으면 합니다. 자식들을 부모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부터 고쳐 가면 어떨까요. 그래서 아이들의 맑은 영혼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칼럼
남도일보
2006.04.1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