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교] 개혁

고려말의 권문세족은 무신정권때부터 흐트러진 토지제도의 최대 수혜자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땅은 어떤 방법으로든 빼앗고 반발하는 이는 노예를 만들었다. 당시 권문세족은 온나라 백성이 원나라로부터 독립을 원했어도 이들은 반대했다.
출세를 거듭하고 부를 쥐고 있는 만큼 세상이 바뀌기를 원치 않았다. 심지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어 아예 몽고사람으로 살아가자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권문세족과 함께 당시 최대의 수혜를 누린 곳이 사찰이다. 권문세족이 기부한 땅과 스스로 이자 놀이로 늘린 땅 등으로 절은 큰 부자였다.
돈맛을 알게된 승려들은 세력을 늘려갔으며 야외에 단상을 설치하고 자리를 열어 세력을 과시하게 된다. 이를두고 야단법석()이라고 한다. 이 행사에 반대파 승려들이 행패를 부리면서 단상이 엉망이 되곤 했다. 오늘날 사용하는 야단법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것이다.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왕이 된 공민왕은 원의 예속국 탈피와 개혁을 주도했다. 공민왕에 의해 개혁 정책의 적임자로 발탁됐던 신돈은 천민의 신분이지만 최고의 권력을 쥐게됐다. 전민병정도감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토지와 노비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같은 개혁도 공민왕 말기에 권문세족의 조직적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신돈은 권력에서 물러나 죽고 공민왕도 내시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개혁은 사회의 모순을 제거하고 발전을 위해서 매우 필요한 조치다. 문제는 조급한 개혁이다. 과거 역사를 비추어 봐도 급진적인 개혁은 성공률이 낮았다. 오히려 민중들은 급진 개혁 과정에서의 상처와 혼란으로 더 큰 화를 입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최대 코드는 개혁이다.하지만 조급증에 빠진 개혁으로 혼란을 주는 일이 빈번해 안타깝다.

이승범 논설위원 tiger@namdonew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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