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지오] 민족음악가 채동선-벌교 생가터를 찾아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국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그림1중앙#

민족음악가인 채동선 선생(1901~1953)의 대표 가곡 ‘고향’이다. 노랫말은 정지용의 시다. 당시 음악교과서에 실릴 만큼 대중의 인기를 차지했다. 그러나 비운의 금지가곡이었다. 정지용이 한국전때 월북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로 바뀐채 40년 가까이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져 비로소 채동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분단과 이념이 갈라놓은 이 땅의 현실이, 가져온 모습이다.
#그림2중앙#
한낮의 태양이 남부럽지 않은 열기를 내뿜는 6월초 토요일 오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세망리. 신축된 벌교읍 사무소 뒷길을 걸었다. 황금이발관(상자기사 참조)을 돌아 들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민족음악가 채동선 선생의 생가터다. 지난 99년부터 2년간에 걸쳐 유명예술인 삶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가지런한 돌담 안, 대문대신 철제 장애물이 조금 가로막았다. 5칸 짜리 한옥이 덩그러니 섰다. 인적은 없고 다녀간 흔적도 찾기 힘들다. 그나마 석류나무 한 그루가 이제 막 패기 시작해 마당을 정겹게 만들었다. 복원된 생가 왼쪽으로 양철지붕으로 덮힌 우물과 20여평의 잔디밭, 그리고 채동선 선생을 기린 조형물 하나가 햇볕을 받고 있다.
#그림3중앙#
뜬금없이 옆집의 수탉이 홰를 쳤다. 꼬끼오~. 따라서 개도 짖었다. 한낮의 정적을 짐승들이 깼다. 본능에 불과하겠지만, 미지의 리듬따라 닭과 개가 몇차례 하모니를 이뤘다.
채동선 선생의 음악적 흔적이라곤 생가에서 찾을 수 없다. 단지 생가터일뿐.
다시 돌아나와 마을을 두리번거렸다. 60~70대 어른들이 소일을 하고 있어 물었다.
“채동선 선생의 어린 날을 아십니까”
“아, 이름은 들어본적 있는데, 글쎄… 그집 사람들이 워낙 빨리 마을을 떠나서 잘 모르것소”
두어차례 동네 어른들을 찾아 물었으나 매 한가지였다.
#그림4중앙#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노래에 담아 민족음악가로 칭송받는 이가 마을사람들에겐 그저 ‘이름만 아는’정도에 불과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때 경기고보 시절 민족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심취했다.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후 일본과 독일 유학 등을 거쳐 음악가로서 성장했다. 1930년 대표 가곡 ‘고향’을 발표했다.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자 아예 서울 근교 수유리에 은둔해 버렸다. 낮에는 농작물과 원예작물 재배에 힘썼다. 나머지 시간엔 우리의 전통 민요채집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다. 왜경의 감시에도 한복을 고집했다.‘혼을 잃으면 나라를, 민족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선생의 뜻이었다.
광복이 됐다. 채 선생은 하늘을 보고 울었다가 웃었다. 음악계의 좌우대립을 막고 고려음악학회를 조직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작곡활동도 왕성하게 전개했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조국’을 비롯해 ‘독립축전곡’, 칸타나 ‘한강’, ‘선열추모가’, ‘3·1절’, ‘개천절’, ‘무궁화의 노래’등이 있다.
#그림5중앙#
민요편곡과 전통음악 발굴에도 애를 썼다. ‘서울 아리랑’를 비롯해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흥타령’ 등 우리 민요를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채동선 선생의 열정과 음악적 실력이 아니었으면 해내지 못할 역작들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벌교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하게 짚으면 행정당국과 음악계에서도 관심깊게 현지화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달 말 완공을 목표로 지상 2층, 344석 규모의 채동선 선생 음악당이 완공된다. 하지만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황금이발관에서 머리를 다듬던 손님 김모(45)씨.
“대종교 나철에 비해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오. 이 마을 태생인 나도 이정도면 알만허요 안.”
다른 손님. “오히려 가끔 오는 다른 지역 사람이나 학생들이 더 많이 아는 것 같소만은…”
이들의 언급대로 생가앞에 흔한 안내표지판도 없다. 어디에 물을래야 물을 곳이 마땅치 않은 게 벌교에서 ‘채동선 선생’의 현주소.
일부에서 벌써 논의된 사항이다. 나철 생가터와 소설 ‘태백산맥’ 관련 현장, 채동선 생가를 함께 묶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속이 채워지지 않은 겉은 생명이 짧다.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깊어져야 하지만 행정당국의 짜임새 있는 관광자원화 작업을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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