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바라보며]주민 손에 달린 지방자치의 품격

요즘 이 지역 자치단체들 상당수가 전화 폭력과 억지 민원에 무척이나 시달리는 중이라고 한다. 웬만하면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돌발성 행태 정도로 치부해버릴텐데 워낙 도가 넘다보니 관계자들의 하소연이 끊이질 않는다. 상황을 살펴보니 거의 사회적 품격의 사각지대가 돼버렸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난 15일 오전 광주 북구청장 비서실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수화기를 들자 다짜고짜 “야! 청장 바꿔”다. 직원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미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다. 이런 전화를 제대로 바꿔줄 비서실 직원은 거의 없다. “일정 탓에 청장이 자리를 비웠다”고 설명해도 민원인은 막무가내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더욱 톤이 높아졌다. 결국 직원이 10여 분간 묵묵히 온갖 폭언을 감내한 뒤에야 어렵사리 전화가 끊겼다.
서구청 비서실 직원 이모씨도 요즘 전화벨만 울리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고 한다. 얼마 전 술에 취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던 민원인이 아닐까 걱정이 앞선 때문이다. 이 민원인은 아무 이유없이 전화를 걸어 “xx년, 청장 바꿔”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씨가 전화를 먼저 끊기라도 하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또 다시 욕설과 함께 폭언을 쏟아낸다.
민선 4기 출범이 넉달이나 지났지만 억지 민원도 끊이지 않는다.
떼쓰기 민원이 늘면서 급기야 ‘블랙리스트’마저 등장했다. 여기에 기피인물로 낙인찍힌 민원인들도 적지 않다.
전화 인신공격이 잇따르자 최근 북구는 상대방 전화번호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쯤돼면 지방자치를 가꾸고 발전시켜야할 주역들이 협력 공생관계 대신 상호 감시하는 긴장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마지 못해 설치하는 함정엔 목표물만 걸려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선의의 피해자는 항시 생긴다. 주민과 공무원, 그리고 정치인들이 일부 품격없는 구성원들의 분탕질에 자치의 본질이나 방향을 상실해버릴 수도 있다.
매사가 그렇듯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나름대로의 품격이 유지돼야만 하는 법이다. 지방자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미 15년이 지나 성숙기에 접어든 지방자치가 품격을 잃으면 언제 역풍을 맞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기초자치 무용론이니 지방의회 폐지론이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세상이다.
지방자치의 대주주인 주민들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품격의 상실을 온전히 주민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지난해 모 일간지가 국민이 매긴 우리 사회의 평균 품격 지수를 알아보니 100점 만점에 겨우 36점 정도였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품격 불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정치 지도층이 쓰는 언어의 품격 점수는 28점으로 조사 항목 중 가장 밑바닥이었다. 응답자의 27%는 아예 0점을 매겼다. 이들은 우리 정치인들을 ‘품격 제로’로 본 것이다.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는 ‘막말 정치’의 심각한 후유증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이버 공간의 네티즌 품격은 32점에 불과했다.
‘익명’의 커튼뒤에 숨은 인터넷 상에서 언어 폭력, 저질 언어파괴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정치권이나 온라인상에서 ‘상호존중의 언어’가 실종되고 ‘상호비방의 언어’가 난무하는 판에 일반 국민이 뭘 배우고 지키겠는가. 정치인의 품격은 곧 정치의 품격이다. 교육의 질이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듯이 정치의 질도 정치인의 자질을 능가할 수 없다.
한국의 정치가 곧잘 3류정치로 치부되는 건 바로 ‘품격제로’정치판이 막말을 보통으로 하기 때문이다. 욕설이 인플레돼다보니 이젠 아예 면역이 생길 정도다.
지방자치도 그에 못지 않다. 중앙정치에서 본받을 게 따로 있지 이런 걸 따라 하고 있다. 주민들이 국민들이 정신차리지 않으면 중앙이건 지방이건 정치의 품격은 평생 구경조차 못할 판국이다.
이 지역부터라도 전화 폭력이나 억지 민원을 근절해 나가는 게 민주성지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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