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대순의 세상보기] 낙락장송이여 영원히…

중국연변 가는 길에 어찌 일송정 푸른 솔을 가지 않으랴. 일송정은 일제치하 이주 조선인의 망향의 장소였고, 독립 운동 밀회 아지트였고 조선인 기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아간 일송정에 마음속에 그렸던 낙락장송은 없고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원래의 그 소나무를 베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혹은 중국인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일본인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많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까닭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남의 탓은 의미가 없다. 다만 거기 대를 이어 서있는 그 서너 자 되는 작은 소나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 그러나 그 작은 소나무가 언제 커서 낙락장송이 될 거나….
내가 용정 중학교를 방문한 목적은 거기 윤동주 시비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 운동장 동편으로 새로 건립한 기념비가 눈에 띄었다. 6·15 공동선언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소박하였지만 연변 조선족의 한과 소망을 말하고 있다. 거기에서 나는 일송정의 작은 소나무를 생각했다. 기념비가 언제 커서 낙락장송같이 될거나. 기념비나 소나무가 커서 낙락장송이 된다 하더라도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시조에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가 있었던가. 비분강개의 절망적 절규이었으리라.
소나무보다 더 잘 자연을 상징할 나무가 있으랴. 낙락장송이 특히 그렇다. 낙락장송은 그 안정감과 완성미로 해 동양문화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살고 곱게 늙어 기개가 높은 상징으로 우리는 소나무를 인식한다. 소나무를 특히 한국인은 그들의 제일 덕목인 수(壽)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나무가 깨끗하고 향이 좋고 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신비하다. 그 솔잎을 가지고 송편을 만들어 먹으면서 우리는 한없이 행복하다. 녹음이 짙어 그 아래 있으면 또 행복하다. 어렸을 적 큰 소나무는 가까이 있었다. 마을 앞에 있었고 뒷동산에 있었다. 높은 산에 가지 않아도 소나무 숲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아무리 맑은 바람이 불어도 지금 무등산에는 그 신비한 소나무 바람 소리가 없다. 그윽한 소나무 향이 없어진지도 오래다. 대신 산길은 여기 저기 쓸어져 누운 소나무를 밝고 넘어야 한다. 아직 살아 있어도 우거져야 할 울창한 가지나 잎은 마치 전란을 만나 늙어가는 것을 한탄한 두보의 시구처럼 ‘비녀를 이기지 못한 성긴 머리’일 뿐이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죽는데 어찌 주변에 선비의 기개가 살아있으랴 생각한가. 소나무가 죽는 것은 오늘의 집념인 실사구시와 관계가 깊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기상은 점차 아열대로 바뀌고 있다. 아열대는 위도 25~35도 지역인데 이 지역은 타이완의 위치이다. 금세기 말이면 한국의 기상은 타이완의 그것과 같아지고 기온은 높아지고 높은 기온의 여름은 길어지고 뚜렷한 춘하추동은 없어진다. 강우량은 많아지고 여름 8개월은 우기이고 끊임없이 태풍이 몰아온다. 근해 어종은 아열대 어종이 주종이 되고 명태나 대구 등은 근해에서 사라진다. 나무도 침엽수는 점차 사라지고 야자수 같은 활엽수가 대신한다. 살아있는 공룡이라는 나의 뜰 은행나무도 침엽수가 아닌가. 현대 문명은 한국의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기상이 아열대로 변하고 있는 실정에서 침엽수인 소나무가 살아남기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젠 그 아름드리 소나무는 전설로 남을 뿐이다. 한국인의 제일 덕목도 소나무에서 찾기 어렵게 되고 그 ‘독야청청’의 기개와 품격도 이제 사라질 날이 멀지 않다.
동양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소나무의 자연은 이제 한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옛날 김홍도가 그렸던 그 소나무를 이미 오늘 젊은 화가들은 그리지 않는다. 백두산 미인송의 운명도 멀지 않다. 일송정 푸른 그 작은 소나무여 그대는 낙락장송으로 자랄 수 있으랴. ‘아 낙락장송이여 영원히.’ 나의 비탄은 절망적 절규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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