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구 칼럼]정율성 선생의 국제음악제와 관광산업

<동신대 초빙교수>

중국에 다니면서 중국인들에게 정율성(鄭律成) 선생에 대해 말하면, 젊은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사람이며, 광주사람이라면 정말 깜짝 놀란다.
조선족 민속축제 때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 ‘이 곡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신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노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 동포들은 정율성 선생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몇 년 전 ‘중국에 더 많이 알려진 음악가 정율성’에 대해 방송한 적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일대기가 중국에서 영화로 나오기도 했다. 금년에도 ‘연안송’이란 드라마가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 방영되었다.
그가 중국에 남긴 것은 음악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존재를 중국인의 가슴에 새겨 놓았던 것이다. 그는 중국 혁명음악가이며, 항일운동가이기도 하다.
중국인 3대 음악가인 선성해, 섭이, 정율성(鄭律成)은 한국인이거나, 마카오의 화교,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변방이었다.
선성해는 그의 원적은 광저우(廣州)이지만, 마카오의 가난한 배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화교이다. 중국 해방 역사를 담은 ‘황하대합창, 생산대합창, 중국광상곡’등을 남겼으나, 아깝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섭이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운남성 곤명시 옥계에서 태어나,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과 ‘전진가’ 등 많은 곡을 남겼으나, 23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서 숨졌다.
정율성은 1914년 7월 7일 불로동(현 히딩크호텔)에서 태어났다. 그는 능주에서 초등학교를 1학년 다닌 기록과 숭일학교, 전주신흥학교를 다닌 기록이 있다.
1933년 그는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러시아의 음악교수 ‘크리노와’로부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부은’이란 이름에서 ‘율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는 혁명 성지를 전국에 알린 ‘연안송’과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창작했다. 당시 험난한 만리장정(萬里長征) 끝에 연안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바로 ‘연안송(延安頌)’을 부르며, 전국 각지에서 연안으로 몰려왔다.
또한 그들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던 팔로군행진곡이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가(人民解放軍歌)’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중국의 군가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 정율성을 알아주지만, 광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2002년 광주시에 정율성 선생기념사업을 추진해보도록 권했다.
광주시는 재정이 열악하기 때문에 포기했으나, 그가 태어난 장소를 광주시 양림동에서 방림동으로 밝혀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구에서 작년부터 음악제까지 열리게 된 것은 잘한 일이다. 이번까지 남구에서 개최하고, 내년에 광주시에서 주최하게 되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사실 그의 유족들이나 중국 측에서 광주시가 주최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했지만, 그리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1976년 세상을 떠나 북경 팔보산 혁명공원 묘지에 묻혀 있다.
그로 인해 한중간의 우호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인으로 중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뚜렷하게 교류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가 왔다. 그가 태어난 불로동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능주와 양림동, 그리고 전주까지도 모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
관광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음악제만 할 것이 아니라, 불로동에 기념비는 건립되었지만, 기념관도 만들어 중국인들이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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