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미정(望美亭)
붉은 바위에 임금을 향한 충절이 서린 망미정(望美亭).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적벽을 바라보며 외롭게 서있는 망미정을 찾는 길은 유난히 칡넝쿨이 우거져 있었다.
망미정의 주인은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丁之寯·1592∼1663)으로 당시 인조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개한 나머지, 고향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 생활하며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지준은 압해정씨(押海丁氏)의 후손으로 자는 자웅(子雄)이며, 호는 적송(赤松)이다.
그는 임진년(1592)에 태어나 6세때 문자를 알았고 역사책을 읽을 정도로 총명한 소년이었다.
정지준은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하는 지경에 이르자 의병을 끌어모았다. 이때 의병으로 참여한 장정들이 불안해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살아도 구차하게 사는 것은 살지 않은 것과 같으며, 마땅히 죽을데서 죽는 것이야말로 죽지않는 것이다. 만약 일을 지연시키고 관망한다면, 지난 날의 충렬(忠烈)의 기풍이 땅에 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며, 앞으로 나라에서도 용납하지 않으리니, 너희들은 두려워 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구하자.”
정지준 앞에 모인 수많은 장정들은 그의 글에 감동을 받아 전투장으로 향했다.
병자호란 당시 그는 의병을 모아 천리길을 단숨에 달려서 적진을 뚫었으나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전갈을 듣고, 머리를 북으로 향하여 통곡을 거듭하다 돌아오고 말았다.
그가 의병을 이끌고 회군(回軍)하면서 읊은 한구절의 싯구는 그의 절개를 엿볼 수 있다.
-海內 周日月 없어 부끄럽지만/ 가슴 속 춘추(春秋)의 의(義) 간직하였네/ 고달픈 망아지 홀로 어조(漁釣)를 즐기니/ 대명천지에 외로운 배 홀로 가네-
그후 정지준은 화순 적벽으로 돌아와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의 뜻을 취해서 창랑과 적벽사이에 정자를 짓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지준의 부인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세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부인 장흥 마씨는 남편이 전장에 나가면‘장군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가 의(義)로움을 발하고 있는데, 어찌 아녀자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라며 한겨울에도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잠을 청했다.
정지준은 이 정자를 화공(畵工)에게 부탁하여 충의(忠義)로 이름난 옛 사람들을 기리게 하여 사방 벽에 부치고는, 늘 팔을 걷어부치고‘한스러운 것은 이 분들과 함께 돌아가지 못함이다’라고 탄식했다.
그는 이 곳 망미정에서 나무송(羅武松)·하윤구(河潤九), 진사 정호민(丁好敏)과 더불어 학문에 전념하다가 계묘년(1663) 12월 숨을 거뒀다.
이 정자는 1646년(인조 24) 적벽 강가에 지어져 전해 내려오다,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1983년 현 위치로 옮겨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김선기 기자 kimsg@kjtimes.co.kr 사진·그림/박주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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