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지난 54년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의 소용돌이 속에서 찬반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던 제3대 국회 본회의장.
한 의원이 단상에서 “무엇 때문에 헌법을 개정하는지 우리 국민앞에 대의명분을 뚜렷이 밝혀야 한다.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버리고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게 되는 이유를 우리나라의 정당제도가 발전되지 못해 내각이 빈번하게 교체되어 행정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민의원의 2/3라는 절대 다수를 점령하는 자유당은 정당이 아닌가…”라며 개헌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함평 출신의 초선의원 인암 김의택이었다. 인암은 일제시기 경찰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가 여타의 친일 경력자들이 여당에 들어가 안주하는 것과는 달리 이승만의 종신개헌을 추진한 자유당을 비난한 것이다.
인암은 1909년 함평군 엄다면에서 김용대씨와 전주 이씨 사이의 4남1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스무살에야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하지만 5년의 전과정을 마치지 못한채 3년 수료로 끝내야 했다. 잠시 무안에서 보통학교 교원을 지낸 인암은 태평로 의사당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경찰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해방직후 미군정의 포고령 2호를 통해 경찰관을 포함한 일제하 모든 관료들에게 현재의 직책 수행 명령이 내려지면서 인암은 경찰에 복귀, 전남경찰청 경찰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의 위원장은 일제시기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노주봉이었다. 이후 전남경찰청 총무과장과 감찰과장, 충북과 전북경찰청의 경찰국장을 지냈다. 경찰을 그만 둔 인암은 52년부터 2년간 전남여객자동차(주) 이사와 전남도 메리야스공업협회 이사장, (주)일광염업 부사장을 역임했다.
이런 그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민당계의 야당인사로 미군정 당시 경무부장을 지낸 조병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암은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함평에서 무소속 출마,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선거는 함평 삼애원을 설립한 자유당의 윤인식을 비롯 8명의 후보가 출마해 경합을 벌였다. 선거도중 도의원을 지낸 이갑수는 사퇴했다. 인암은 이 선거에서 1만637표를 득표해 9천655표를 얻는데 그친 윤인식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차점자로 낙선한 윤인식은 이후 7대때 인암의 비서관을 지낸 이진연과 겨뤄 당선, 9대까지 내리 3선을 기록하며 10대에는 유정회로 국회에 진출, 4선의원이 됐다.
첫 등원한 인암은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대토론을 비롯, 매우 활발한 의정활동을 했다. 특히 신익희, 조병옥 등과 함께 60인 호헌동지회에 참가해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초선의원인 전북의 유진산과 가까이 지냈던 그는 야당 조병옥계에 속했다.
함평 출신은 아니지만 함평군 농민회장과 양조장을 운영하던 이필중이 자유당 공천을 받은 58년 제4대 선거에서 인암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제헌의원 선거에서 이성우에 패배하면서 2위에 그쳤던 노경수도 출마해 3파전 양상을 띠었으나 인암은 2만1천여표를 얻어 1만7천여표에 그친 이필중을 누르고 재선의원에 당선, 민주당의 원내부총무가 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터지면서 임기도 채우지 못한채 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5대 선거는 우리 정치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결의 장이었다. 민주당 공천을 받은 인암은 무소속의 김석과 맞붙었다. 김석은 한독당 중앙위원과 해방 직후 광주치안대장과 청년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한 사람은 일제시기 경찰이고 한 사람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 정치판에서 만난 것이다. 인암은 이 선거에서 1만3천여표의 차이로 승리, 3선을 기록하면서 민주당 원내총무가 됐다.
4·19혁명의 바람을 타고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갑자기 비대해진 조직으로 구파와 신파간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구파에 속했던 인암은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긴 것은 자르고 짧은 것은 이으면 된다”는 대화정치론으로 정치 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발발하면서 함평과 영광이 한 선거구로 합쳐진 63년 제6대 선거에 민정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지만 차점으로 낙선했다. 당시 선거에는 정헌조와 조기상, 서진걸 등 영광 출신 3명과 함평의 김의택, 김석 등 5명이 출마했다. 선거 결과 2대에 영광에서 당선되었던 정헌조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인암은 정치 입문 이후 첫 패배를 맛보았다.
이후 인암은 8대때 신민당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하며 9대에는 서울 영등포에 출마, 낙선했다. 의원으로서 인암의 의정활동은 4선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함평에서 3대부터 5대까지, 8대에는 전국구로 국회에 입성한 그는 4·19와 5·16, 유신 등으로 임기를 모두 채운 것은 3대 뿐이다. 결국 4번의 의원 경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의원 생활은 8년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 초반 인암은 긍정 속의 부정이라는 논리로 유신체제에 참여했다. 그는 참여하의 점진적 개혁이라는 진산노선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선명하지 못한 정치색은 74년 유진산 총재가 숨지자 총재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아 당권에 도전하지만 조직과 자금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당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난 인암은 10여년간의 정치공백을 가졌다. 그가 다시 정치에 문을 두드린 것은 5공화국이 들어선 80년 12월 보수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민권당을 창당하면서 부터다. 다음해 2월에는 민권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만 전두환, 유치송, 김종철이 겨룬 선거에서 가장 낮은 득표를 기록했다. 민권당 또한 81년 3월 25일 11대 선거에서 단 두명의 당선자를 내 야당의 법통을 민한당에 넘겨주어야 했다.
일제의 경찰에서 야당의 총재까지 굴곡의 인생을 살아온 노정객은 83년 타계했다. 그의 아들 김우창은 고려대 인문대학 영문과 교수로 있다.
친일 경력자들 대개가 여당에 안주했던 것과는 달리 험난한 야당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인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국관을 토대로 강경과 극단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택하고 최선보다는 차선의 실리를 추구했던 정치 스타일은 선명 야당 노선을 내세운 정치인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박상수 기자 pss@kjtimes.co.kr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