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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의 야당 골수 김녹영 의원(1924~1985)


전남지역의 야당 골수로 통하는 백우 김녹영 의원. 김녹영의 정치역정은 백두산 아래에서 가장 우둔한 사람이라며 스스로 붙였던 백우라는 아호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해방직후 청년당 활동과 전남도의원, 민주통일당 총재 직대, 민추협 상임위원, 신민당 부총재, 국회부의장 등 그의 화려한 정치 이면에는 우둔할 정도로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매진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소신 속의 야당 외길 인생과 민주화 과정의 투옥과 해금으로 이어졌다.
장성군 황룡면 출신인 백우는 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광주을 후보로 출마, 공화당의 김남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김남중 후보는 현 광주일보의 전신인 전남일보 사장으로 지역내의 유력자였다. 이를 제치고 당선된데는 백우 특유의 선거전략이 주효했다. 서민적이고 군중심리를 사로잡는 대중적 연설에 능했던 백우는 여성표를 공략,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갑구에서는 신민당의 정성태씨가 당선되면서 이 지역에서는 최다선인 6선을 기록했다.
광주가 한 선거구로 통합돼 두명을 동시에 선출한 73년의 제9대 선거에서 백우는 6만2천여표를 득표, 2위를 차지한 공화당의 박철과도 2만3천여표 차이로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신민당의 정성태는 3위에 그쳐 패배하는 바람에 8대 의원을 마지막으로 의원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9대 선거에는 이들 외에 무소속으로 이기홍과 6대와 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래정이 출마해 접전을 벌였다. 박철에 패배한 정성태측은 한때 집권당의 사전선거에 따른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법적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였으나 결과에 승복했다는 후문이다.
78년 10대에는 이전 선거에서 부정선거에 휩싸인 공화당의 박철씨가 낙선하고 백우는 같은당의 신민당 이필선씨와 나란히 당선됐다.
그러나 80년 서울의 봄은 백우에게 정치적 의미 뿐만아니라 인생의 수난을 예고했다.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면서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정치적 추종자인 김대중과 행동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80년 8월14일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재판은 김대중을 죽이기 위한 신군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죽음의 의식’이었다. 백우는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 김상현, 이신범, 조성우, 이해찬, 이석표, 송기원, 설훈, 심재철, 서남동, 김종완, 한승헌, 김윤식, 한완상, 유인호, 송건호, 이호철, 이택돈 등과 함께 연루돼 군법회의에 기소됐다. 이 사건으로 정치적 활동이 중단된 백우는 81년 3월25일 치러진 제11대 선거에 출마도 하지 못했다. 백우는 김대중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하고 자신의 해금이 있기까지 동향 출신인 김상현 등과 함께 민추협을 꾸려 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백우의 정치적 재개는 84년 11월30일 제3차 해금으로 풀려난 옛 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과 김대중·김영삼의 지원으로 결성된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을 토대로 이뤄졌다. 백우는 85년 1월18일 서울 앰베서더 호텔에서 열린 신민당 창당대회에서 5명의 부총재 중 한명으로 선출됐다. 창당대회에서 당 총재에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이 선출됐으며 백우를 비롯, 이기택, 조연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이 부총재로 당선됐다.
이날의 신민당 창당은 다가올 2월12일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것이었다. 신민당은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전국적으로 신당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선거일 4일전인 2월8일 미국 망명 2년여만에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부 여당(민정당)은 김대중의 귀국을 막기 위해 투옥시키겠다고 위협했으며 필리핀의 아키노가 암살된 직후여서 신변보호를 위해 미국의 정치인들이 동행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죽음을 각오한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흩어진 야권을 결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12대 선거는 국민들의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 야당이 승리하는 정치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선거에서 백우는 광주 서구에 출마해 여당인 민정당의 이영일과 나란히 당선됐으며 현재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으로 민주당 북갑지구당 위원장인 박광태씨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당시 선거에서 김녹영은 7만8천458표, 이영일은 4만4천837표를 얻은 반면 박씨는 6천760표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12대 선거에서 백우는 ‘호남정치의 1번지’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동구를 정치 초년생인 신기하에게 넘겨주고 서구에서 출마했다. 이를두고 금품이 오고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직내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어 사실 확인이야 불가능하지만 한 측근은 만약 금품을 받았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백우로서는 어쩔수 없는 불가피한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여당이 돈으로 선거를 치를때 백우의 선거캠프는 먹을 쌀조차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선거운동원들은 점심 한 그릇으로 하루의 식사를 때울 정도로 궁핍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백우의 경제적인 여건은 와상(평상)을 지인에 팔 정도였다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 이면에는 몇년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되면서 민추협 등 실질적인 야인생활을 했던 백우에게 지병(암)치료비와 선거자금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 선거가 되어버린 2·12총선에서 백우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정치적 수난을 극복하고 등원한 12대 국회에서 백우는 공화당의 목포 출신 최영철과 나란히 부의장에 당선됐다. 광주·전남지역 출신이 같은 회기에 나란히 국회 부의장에 당선된 것은 우리의 의정사에서 12대 국회가 유일하며 백우는 내심 국회의장으로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80년의 신군부 탄압과 무리한 선거운동은 백우의 지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60대의 정객에게도 지병은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4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에 당선된 백우는 선거가 끝난지 5개월여만에 치료차 떠났던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건국훈장을 포상했다.
/박상수 기자 pss@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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