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8월6일 새벽 1시35분께 승객 231명과 승무원 23명 등 모두 254명을 태운 대한항공 KE-801편 여객기가 서태평양의 미국령인 괌의 수도 아가냐의 ‘니미츠 힐’에서 추락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 사고로 승객 200여명의 원혼이 머나먼 이국땅에 묻혔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탑승객 29명 중 24명이 숨졌으며 아까운 정치인 하나를 잃어야 했다. 그가 바로 신기하 의원이다. 신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광주 동구 당원 수련회를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부인 김정숙씨와 함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린 것이다.
신 의원은 당시 4선의원으로 전남대 재학 시절, 4·19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민추협 등을 통한 민주화 투쟁에 이어 정치에 뛰어든지 12년만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를 잃은 아쉬움은 컸다.
신씨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85년 제12대 선거때 부터이다. 전남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와 변호사로 생활하던 그가 정치에 입문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던 그가 정치라는 험난한 길, 더구나 야당의 길을 택한 것에는 지역적 특색을 감안하더라도 결정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가 출마한 광주 동구에는 민한당의 이필선, 신사당의 안광양, 민족당의 김병수, 민정당의 고귀남, 무소속의 임재정씨 등 6명이 출마했다. 이필선씨의 경우 5대와 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고귀남씨는 10대와 11대, 임재정씨는 11대 현역 국회의원으로 지명도나 정치적 경륜에 있어 정치 초년생인 신씨를 월등히 능가했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결과는 신씨의 압승으로 끝났다. 선거구가 통합돼 2명을 선출한 선거에서 신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망명길에서의 귀국에 따른 신당 바람을 타고 무난히 당선됐다. 선거에서 신씨는 9만6천449표를 얻었으며 고씨는 6만680표를 득표했다.
주위사람들은 이같은 그의 정치적 결단을 두고 흔들리지 않은 정치적 소신에 따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결정에 대해서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이는 야당 원내총무 시절 예리한 판단과 정치력, 뛰어난 협상력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여당 원내총무는 현재 이한동 국무총리였다. 이 총리와의 협상은 정국 현안을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제공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도 청와대로 야당 총무인 그를 불러 사안에 대한 논의를 했다 한다.
북구가 분리된 13대 선거에서 신씨는 동구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12대 선거에서 동반 당선된 민정당의 고귀남 후보와 2파전을 양상을 띄었다. 그러나 황색돌풍을 일으킨 야당의 바람은 신씨의 승리로 끝났으며 재선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당시 선거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광주지역 5개 선거구에서 모두 평민당 후보가 당선됐으며 북구의 정 웅씨는 12만7천여표를 득표해 전국 최다득표 등 3관왕에 올랐다. 또 서갑에서는 정상용씨가 광주일고의 선배이자 고향인 함평 선배인 이영일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2선을 무난히 달성한 신씨에게도 힘겨운 선거가 있었다.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치러진 92년의 14대 선거이다. 감사원 감사관 출신으로 양심선언과 함께 기존 정치의 변혁을 요구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문옥씨 때문이다. 이씨는 재야와 사회단체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재선의원의 신씨와 맞붙었다. 이씨의 여론몰이는 신씨의 선거캠프까지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신 의원은 의외로 당선을 자신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유권자들과 악수를 하면서 느낀 힘의 감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예전과 다름없는 힘의 감각을 느꼈다며 신씨는 무리없는 당선을 측근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예측은 그대로 결과로 드러나 신씨는 3선의 중견의원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국회에 입성한 신씨는 94년 5월 제14대 국회 후반기를 이끌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 도전했다. 김태식(전북 완주) 총무와 맞붙은 선거에서 신씨는 49대 46으로 승리했다. 신씨는 당초 당내 비주류라는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이기택 대표와 동교동계, 김원기 최고위원 등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 의원에게 열세가 점쳐졌으나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면서 이전 총무 경선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신씨는 김상현, 정대철 의원 등 비주류와 이부영 최고위원 등 개혁정치모임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거과정에서 내세웠던 당직순환론이 호응을 받아 범주류측 일부 의원들의 표를 흡수, 당선된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96년 15대 선거에서 신씨의 발언은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금기시 되었던 김대중 총재의 차기 후계론을 거론한 것이다. 신씨의 발언은 가시화하기에는 이르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해진 것이었다. 발언은 김 총재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지는 등 확대 해석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신씨에게 97년의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동구 지구당 당원 연수차 괌으로 향하던 당직자 24명이 사고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는 차세대 정치 지도자의 부부를 죽음으로 몰았다. 신씨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라 노모의 가슴에 통곡으로 남겼다. 노모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 결국 사고가 난지 50여일만에 아들 부부 곁으로 떠났다.
생전 측근들은 죽은자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신씨에 대한 평가는 남다르다. 외형적으로 풍기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으로 평하고 있다. 반면 정치적 결단력과 판단력, 협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여야간에 정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현재의 국회를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의 존재가 아쉽다고 회고하고 있다.
매년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 묘소에서는 지역 정치인을 비롯한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박상수 기자 pss@k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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