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일대 당산제 ‘원조’
콩 구워먹다 당산목 태워
생선·고추가루는 안 써
도둑도 빙빙돌다 날 새

백제·신라때 추성현, 율지현(栗支縣) 등으로 불리웠던 담양.
금성면 원율리(原栗里·밤나무골)는 담양의 역사이자 뿌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을에 남아있는 객사터나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피어린 역사의 현장이자 ‘동양의 마케도니아’ 금성산성에서도 그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다. 산성은 바로 이곳 주민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하나하나 쌓아 올렸던 철옹성.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함께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 당산제를 지낸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생긴 이후로 추측한다면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셈이다. 때문에 밤나무골 당산제가 담양일대서 행해지는 당산제의 본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를 지내던 큰 당산나무는 성인 12명이 양팔을 뻗어야 겨우 닿을 정도로 조선말 전국에서 두번째로 꼽히던 거목이었다. 주민들도 이 나무를 신성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큰 당산나무는 해방 직후 소실돼 버렸다. 어이없게도 콩타작(콩을 구워먹는)하던 아이들의 불장난 때문. 큰 당산나무는 소실됐지만 새로 자라 제법 굵어진 당산나무가 역할을 이어받았다. 마을회관 앞 작은 당산나무들도 수령이 500여년을 훌쩍 넘는다. 나무틈에 박혀있는 신위석(입석)이 세월의 더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월 대보름 자시(0시)부터 제관들은 큰 당산나무와 작은 당산나무를 찾아 차례로 제를 올린다.
이를 위한 준비는 열흘전 시작된다. 마을 회의에서 제관, 유사, 화주 등을 선정하고 명화전(제수비용)을 갹출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궂은 일과 부정을 멀리하며 근신한다. 5일전이면 온 마을에 황토를 깔고 마을입구와 당산나무에 금줄을 쳐 부정을 막는다.
열 나흗날 초저녁부터 주민들은 잡귀와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당굿·조항굿·샘굿 등을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어 자정무렵,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관들은 당산나무를 차례로 돌며 제례를 봉행한다. 신위석에 ‘당산신위(堂山神位)’를 써 붙이고 상석에 제물을 진설한 후 제례에 들어간다. 제례는 초헌·아헌·종헌관, 축관, 2명의 집사가 주관한다. 풍년과 무병장수, 그리고 국가안녕을 비는 축을 고한 후 소지한다.
제례는 유교식으로 일반적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나 제물을 준비할 때 반드시 따지는 것이 있다. 생선과 고추가루는 절대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왜 그래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주민들도 이 날 만큼은 음식을 가려 먹는다. 게다가 부정하지 않은 남자들에 한해서 당산제를 지켜볼 수 있다.
당산제를 주관했던 송진석씨(72)는 “제를 잘 모셔 느티나무에 잎이 풍성하면 그 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고 설명한다. 또,“마을에 신령이 있어 도둑도 제대로 도둑질을 할 수 없어 마을만 빙빙 돌다 날을 새기 일쑤”라고 당신(堂神·당할아버지)을 신성시하면서 “두번에 걸쳐 잎이 돋으면 큰물(홍수)이 두번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 당산제. 제가 열리기 5일전, 주민들이 마을회관 광장의 작은 당산나무에 부정을 막기 위한 금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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