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지난해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되신 어머니는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계신다. 자식들이 찾아와 함께 있을 때면 간간히 미소를 띠어주시지만, 저켠으로 시선을 돌릴 때면 어느사이 굳어있는 얼굴이다.
물끄러미 먼 곳을 쳐다보는 듯한 어머니의 시선은 곧 아버지의 영정위에 머물곤 한다. 그곳이 제자리인양 어머니의 시선은 움직이질 않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매우 행복한 모습이다. 살아계신 이를 대하듯 “훈이 아버지~”를 나직이 부르시곤 한다. “느그 아버지 보고싶다. 저리 허망하게 가실줄 누가알았것냐?”
어느 사이 두뺨에는 그리움 가득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정 곁에 항상 철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흰국화를 소담하게 두신다. 꽃들이 조금이라도 시든 모양새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가, 꽃사러 가자. 예쁜 꽃사와야 겠다”
자식들이 일어서기도 전에 총총 걸음으로 앞장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신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바치는 꽃이기에 야박하게 값을 깎거나 부족하게 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떠나 보내신 게 당신의 잘못인양 느끼신다. 자식들이 보기에는 평생 하늘처럼 아버지를 모셨건만 정작 당신은 아쉬움뿐인 모양이다.
곁에 있기에는 너무 부족한 여자였는데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말씀만 되풀이 한다. “느그 아버지는 많이 배운 사람이고 나는 못 배운 사람이다. 그런데 50여년을 함께 살면서 단 한번도 그런 차이를 말하거나 핀잔을 준 일이 없었다”
실제 생전의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를 칭찬하셨다. “당신 음식이 제일 맛있오” “당신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소” “당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리 행복하게 살겠오”
그런 말씀으로 어머니를 감싸안으셨다. 짧은 일본어로 전화를 받아 건네줄 때면 “당신 일본말 솜씨가 외교관 저리가라할 정도요”라고 등을 토닥거려 주시면서 가볍게 안아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아버지의 뜻이 서면 어떤 경우든 뒤를 따랐다. 어쩔때는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아내로서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기꺼이 접으시곤 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해외출장 가방을 챙겨주면서 “젊은 여자들 상대하기에는 이제 당신 나이가 많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웃으며 말을 건네는 어머니의 모습에 자식들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자식들은 오랫동안 그런 어머니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형이 한번은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어머니, 여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느그 아버지,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사람인데 막은다고 될일이냐? 어차피 하실일이면 마음 편하게 하시라고 그런거다. 나라고 속이 편했것냐?”
어머니는 허리디스크가 심해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다. 두어시간 차를 타면 이틀정도 끙끙앓으실 정도다. 그런데도 2주일 정도가 지나면 “느그 아버지 외로우시겠다. 아버지 보러 가자”라며 자식들을 앞장세워 영암 선산으로 향하신다. 언제 준비를 하셨는지 생전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들이 두손 가득 들려져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묘 앞에 서면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예의를 갖춘다. 천천히, 그리고 깊숙히, 머리를 숙이는 어머니의 모습. “찬데 계신데 나만 따뜻한 데서 지내 미안해요.” 그런뒤면 한참동안을 아버지 묘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대하지 못했던 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주고받으시는 모습이다. 가끔은 아버지 묘소 곁에 한참을 누워 있다 오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또 파킨스병을 앓고 계신다.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추억과 자식들에 대한 기억이 차츰 없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으신 눈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진행을 더디게 하는 치료제 반알을 복용하셨는데 어느 사이 한알 반을 드시고 계신다. 어머니 스스로 의사를 찾아가 복용량을 늘리셨다고 한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말투가 매우 어눌해지셨다.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고 등도 많이 구부정해지셨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 자식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1주일 뒤면 어머니의 생신이다. 아버지 없이 첫번째 맞는 어머니 생신이다. 자식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경치 좋은 섬으로 여행을 가겠다며 부산을 떨지만 어머니는 겉으로만 맞장구를 치시는 눈치다.
새삼 아버지의 자리가 아쉽다. 어머니를 지켜왔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절감한다. 생신날 모시고 갈 곳은 섬이 아니라 아버지 묘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곳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아버지 묘소 곁에 오래오래 누워있다 오는 것이 최고의 효도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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