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천둥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깊은 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봄비 같지 않고 제법 굵은 소리를 내면서 뜰에 지고 있다. 4월이 아직 남아 있는데 무슨 여름 같은 천둥일거나…. 세상이 어지러운데 천둥이라도 울려야지 제격이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차라 잠결에 만난 천둥은 이상하게 감미롭다. 쾌감과 같은 것이다. 아니라도 현실과 관계가 없는 먼 나라에서 생긴 일을 상상하거나, 어느 먼 옛날의 큰 사건을 즐기는 마음과 같은, 아니면 어떤 격정의 사건을 다룬 문학 작품을 읽는 즐거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 무엇인가 사건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신호일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을 저질러 놓고 속마음으로는 그 일 앞에 나서기가 겁난다. 남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그에게는 현실적 고민이다. 내가 그렇다. 사실은 모레면 4월 30일이 되고 그날 나는 무등산 서석대 100회 등정을 위하여 사람들을 초대해놓고 있다. 혼자 산행하면서도 고산고수(苦山苦水)로 형편없이 무너지는 자기 모습이 남 앞에 노출되는 그날이 오고 있는 것이다. 계획을 발설 해놓고 정작 그날이 다가오니 마음의 부담이 생기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벗은 현수막을 준비하겠다고 나섰고 남도일보는 취재기자를, 또 다른 사람은 기념타월을, 가족은 그 답으로 동행에게 점심을 대접할 계획이다. 그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천둥이라도 울면 얼마나 신날까. 이 노인의 흥분된 분위기에 동행이 많기를 바란다.
지금 무등산 서석대는 아직 겨울이 남아 있다. 차갑기가 영하이고 바람은 매섭다. 서석대는 산 아래에서 생각한 날씨가 아니었다. 주말인데도 사람은 귀하고 더러 만나는 산 사람들도 거길 벗어나기가 바쁘다. 주변에 봄기운은 아직 감지할 수 없다. 꽃이 피면 무등산 팔경이라는 철쭉의 장관도 그 절경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주상절리 암석들도 그 검은 회색으로 보아 아직 봄은 멀다. 선바위 틈으로 화사하게 진달래가 피기 까지는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산 아래 멀리서 아스라하게 들리는 춘정의 봄 꿩 소리로 보아 분명 봄은 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소리가 서석대에 오르기까지는 더 가픈 숨을 몰아쉬어야할 것이다. 다시 비 줄기가 굵어진다 싶더니 이윽고 천둥이 울었다. 천둥은 원시인들에게 계시였다. 때로는 공포를 가져왔고 때로는 영감을 주었다. 인류학에 의하면 천둥은 그들에게 신호이었다. 천둥에 따라 그들은 행동하였고 천둥에 따라 그들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들은 행동을 위하여 천둥을 기다렸고 기다리던 천둥이 울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이었다. 천둥은 언제나 벼락을 동반한다.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나오는 힌두교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신과 사람과 동물이 언쟁하다가 하나님에게 가서 정답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세 번 벼락을 쳤다. 그 벼락 소리를 신은 베풀어라는 말로, 사람은 순종하라는 말로 들었고 동물은 욕심을 버려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천둥은 나에게 그 동물이 인식한 욕심을 버려라고 말한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미쳐서 황야를 헤맬 때 천둥은 매우 멋지게 울렸다. 그 시원한 느낌 속에 인간은 하나의 자연이다.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러시아 오스트로후스키의 희곡 ‘천둥’에서도 천둥은 매우 효과적이다. 어느 천둥치는 날 부정한 여자 카데리나는 고민하다가 자기의 부정을 고백한다. 그리고 정부까지도 자기를 버리자 자살한다. 이 일은 사회의 냉담과 무지, 탐욕, 위선, 압박에 대한 한 여인의 항의였고 인간적 권리의 주장으로 해석되었다. 극적 천둥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충격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둥은 암흑 속에 비친 한줄기 햇빛과 같은 것이다. 나도 시집 ‘산하山下’에서 몇 번이고 천둥을 울렸지만 그 천둥은 멀리 퍼지지 못하고 다만 자기 속에서 울었다.
<전남대 명예교수·영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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