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석


‘벌초 대행, 벌초해드립니다.’ 이 같은 플래카드는 추석이 임박할 때마다 국도변에 널린다. 워낙 바삐 돌아가는 세상인지라, 조상님의 산소를 직접 벌초하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벌이는 장사이다. 의뢰자는 벌초를 해서 좋고, 대행자는 그 대가를 받아서 좋다. ‘거래의 이익’(gains from trade)이 발생하기에 가을철 시장인 ‘벌초시장’이 형성된다.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제사상 차림’마저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됐다. 제사상 차림 대행서비스의 시장도 커지는지, 인터넷 상에 그런 사이트가 많다. 이제는 자기 집이 아니라 서비스업체가 제공하는 장소에 마련한 제사상 앞에서 제사를 모시기도 한다고 한다.
‘벌초시장’과 ‘제사상 차림 시장’의 발달은 일상생활이 얼마나 바쁜가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벌초를 하고 제사를 모시는 정성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못된다. 먼 훗날에는 그런 모습조차도 보기 힘들지 모르니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아버지’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혼인’이 무엇인지를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가. 예절교육을 딱히 시간을 내서 전문 강사에게 배워야 하는가.
고도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바뀌었다. 시장이 가정까지 장악한 꼴이다. 시장화의 과잉이다.
마침내 시장은 종교의 영역까지 포획했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봤다.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치부되길 바랄 뿐이다. 교회를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됐고, 일반 상가의 거래에서 보이는 권리금이 교회의 매매과정에서도 존재한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교회매매’를 입력하니까, 관련된 카페와 사이트가 나왔다. 거래 시에 신자 한 명이 100만 원의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신자가 100명이면, 환산 가치는 1억 원이다. 목회자의 눈에 신자는 인간이기보다는 그저 돈 덩어리로 비칠지 모르겠다.
시장경쟁의 논리가 체질로 굳어지면서 보통사람의 사고와 존재의 양식은 시장중심으로, 돈 위주로 바뀌어왔다. 종교마저도 자본주의의 틀에 갇히게 됐다. 한쪽에서는 비우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꽉꽉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연대하자고 해야 할 종교에서 몸집 불리기 경쟁이 치열하다. 결국 교회의 독과점화가 진행되는지 모를 일이다.
작은 교회에서는 신자가 줄어드나 대형교회에서는 늘어난다. 교회 건물은 더 크게, 동양에서 최대로, 아니 세계에서 최대로 크게 지어야 한다. 그 커진 몸집을 유지하려니까 영혼은 별 볼일 없고 돈이 전부로 보이게 마련이다.
지난 2월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전날 영업시간 마감 이후에 거액 예금이 특혜로 인출되고, 영업정지 관련 핵심정보가 이미 새나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금융감독원과 저축은행의 관계자의 도덕적 기강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힘센 자의 돈에는 눈이 달렸는지 자유를 찾아 날아갔다. 한 푼 두 푼 모아 저축했던 대다수 서민의 돈은 묶였다. 그들의 피맺힌 절규에 가까운 시위를 텔레비전에서 봤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어불성설이 횡행하는 바를 모르지 않으나, 최근에 더 심해졌음을 느낀다. 힘이 세다함은 무슨 뜻인가.
저축은행의 특혜인출예금 사건이 보여주듯이, 파울플레이를 드러내놓고 해도 떳떳하다는 뜻이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파울(foul)은 반칙이다. 경기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해서 만들어진 경기규칙을 깡그리 무시해버려도 별 탈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가정과 정신세계의 영역까지 시장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우리나라는 첨단을 걷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가 되었다. 그에 따른 폐해를 줄이려면, 독일처럼 시장경제를 사회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주요 선진국 중에서 경제가 탄탄해 보이는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해왔다.
지배세력은 자신의 기득권 보전 차원에서라도 ‘사회적’이라는 경기규칙을 지켜야 한다. 현 지배집단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4·27 재보궐선거에서 견제세력이 승리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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