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푸른 하늘을 보면서 근대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높고 푸르고 이상적이고 설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이 희망을 갖게 하고 살아가는 의지를 확인케 하고 하늘을 보면서 저 하늘이면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공감과 교감을, 소통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5월에 어린이날을 두고 어버이날을 두고 스승의 날을 두고 가정의 달로 부르면서 사랑스럽고 아늑하고 다정한 마을을 강조한다. 낙관적이고 희망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행복해 진다는 꿈을 갖게 하는 달이 5월이다.
5월은 가난도 참을 만하고 5월은 슬픔도 감미롭다. 내일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월에 내리는 비를 사랑한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록을 더 푸르게 하고 푸른 하늘을 더 높게 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이라 함은 오늘 많이 시대착오적이지만 회고할만한 가치이다. 서양사상에서 그것은 인간중심적 개념을 의미한다. 인간중심이란 신 중심에 대한 반대개념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우리들은 사상적으로 서양적 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신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서양의 근대화 이후로 이미 신이 관대해진 뒤였다. 사실상 우리는 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신이 그 위대함으로 인간을 얼마나 속박했는지 잘 모른다. 서양이 순서를 두고, 즉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시켜 온 인간중심적 근대화를 과정에 대한 훈련기간이 없이 결과적인 것을 함께 들여오다 보니 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몰랐다.
서양의 신에 대한 유산한 개념으로 동양에는 하늘이 있었다. 동양의 우리들은 하늘을 절대시하였다. 하늘을 의인화하여 하늘은 모든 것은 다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다 통제한 위대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고,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하늘이 뜻을 기다리라 하였고, 천명이라 하여 하늘에 목숨을 맡겼다. 그러나 동양의 하늘은 독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온화하였고 독점적인 것이 아니었고 위압적인 것이 아니었다. 동양인은 하늘로부터 해방을 생각하거나 탈출을 생각한 적이 없고 하늘을 원망하였지만은 그러나 하늘을 미워한 적은 없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는 말의 하늘을 서양적 신으로 대치하여 ‘스승의 은혜는 신과 같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동양의 하늘은 서양의 신보다 인간적이다.
오늘 내가 5월을 근대적인 것으로 느끼는 것은 오월을 인간적인 것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다. 이제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신도 미소지을 것만 같은 5월,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고 땅은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고 그 사이 인간은 자기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으로 끝없이 하늘과 친하고 싶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미움도 없고 살상도 없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 지진도 없고 쓰나미도 없고 원자로 폭발도 없고 미국의 토이네이도도 없고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도 없고 리비아의 참상도 시리아의 살상도 없고 소말리아의 해적도 없고 한반도의 남북 간 미움도 대결도 없는 오월에는 다만 인간의 평화에 대한 기도만 있고 그 기도를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신이 같이 경청하는 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 헛소리를 느낀다. 나는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너무 멀고 현실과 너무 먼 비현실적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지구는 죽어가고 있고 사람간의 미움은 더욱 넓어지고 있고 인간 상호간의 살생은 더욱 악랄하다. 현실 속에 신은 이미 죽고 현실 속에 하늘은 이미 의지를 상실하였다. 인간에게 현실은 절망적인 것이 사실이다. 이 절망적 상황에서 누가 무엇이 인간을 지구를 구해줄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이 절망적 시대에 인간의 실존을 5월의 높고 푸른 하늘에서 보고 싶다는 작은 희망과 절규를 누가 헛소리라 말하는가.
<전남대 명예교수·영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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