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록키산맥의 한국인들
모두들 잘 아는 바와 같이 한인들의 미국이민은 1902년에 시작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인천 내리교회 신자 121명이 고향산천을 등뒤로 하고 그해 12월22일 인천항을 출발해 다음해 1월 13일 호놀루루항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첫 이민행렬이다.
1905년까지 7000여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에 도착, 험한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50년대 말까지 중단됐으나 이후 다시 계속돼 현재 미국에는 200여 만명의 한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정치계에 진출하는 한인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한인들의 경제력은 미국인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1900년대에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의 생활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경우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한인들은 농장주들로부터 짐승같은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 본토로 이주를 원했으며 운 좋은 한인 1천여명이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본토로 이주하는데 성공한다. 1900년대 초 미 중서부 지역의 탄광지대에서 광부로 살았던 한인들은 대부분 하와이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그러나 유타대 이정면 교수가 묘비연구 과정에서 1890년 이전에 사망했으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솔레이크 시립묘지 등지에서 찾아냄에 따라 한국인의 미국이민 시기가 공식적인 것보다 훨씬 빠를지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8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미 대륙 횡단철도 공사는 한국인들이 1902년 이전에 미국본토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해주는 것이다. 미 대륙 황단철도 공사와 관련해 아시아계 노동인력을 거론할 경우 흔히 중국인 노동자(쿠리)들을 지목한다.
1900년 이전에 미국본토, 특히 유타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미 본토 유입의 배경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타주 대량 유입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의 미 대륙 횡단철도공사 참여설인 것이다.
이는 중국인 노동자들 가운데에 한국인 노동자들이 상당수 끼여있었다는 주장이다. 1860년대 많은 한국인들이 철도공사 노동자로 일하다가 공사가 끝난 뒤 광산노동자로 일하다 사고나 질병, 또는 자연사한 뒤 유타 지역의 묘지에 묻혔을 것이라는 추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자와 이 교수는 180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일부 한인들을 선 이민자(先 移民者)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선 이민자들은 어떻게 그처럼 일찍 미국 땅에 오게 됐을까. 이에 대한 해답의 단초는 180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암울했던 상황과 이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의 유민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근대사에 있어 한국민족이 대량으로 해외이주-엄밀히 말해서 유민들의 해외정착-가 이뤄진 것은 1860년대 이후부터이다. 구 한말시대 많은 한국인들이 관리들의 학정과 기근에 살길이 막막해지자 조선 땅을 등졌다.
1800년대 구한말 조선 땅에서 발생했던 440여만 명의 유민이 1902년 훨씬 이전에 미국 땅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역사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자료와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조선 땅을 등진 유민들 중 200여만 명은 중국 동북부로, 40여만명은 러시아 연해주로, 또 200여만명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 만주로 떠나갔던 한국인중 일부가 중국 상해·남경을 거쳐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외모가 비슷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중국인들이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들이었던 한국인 쿠리 들이 철도공사가 끝난 뒤 유타 주 등 미 중서부 산간지방의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을 것이라는 상황설정은 비교적 설득력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한국인들의 족적은 매우 희미한 상태이다. 미국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박물관에는 일본인으로 잘못 분류됐지만 분명히 한국인인 노동자들에 대한 각종 자료와 서류가 보관돼 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미국 중서부지역에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들이 남긴 기록과 자료는 단 한 건도 없는 상태이다.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한인들의 발자취를 찾는 작업은 비문연구 외에도 유타주와 와이오밍주 등 록키산맥 일대의 광산지대를 중심으로 광산회사측이 보관중인 고용자 기록카드 검토 및 박물관 자료검토, 법원기록 열람, 재판소인근 묘지 현장조사 등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다행인 것은 한글로 쓰여진 묘석이 발견되기도 하고 한인 광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의 기록에서 가끔씩 눈에 띤다는 것이다. 한인들이 남긴 기록이 없으니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 각종 기록과 서류들을 뒤져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이동상황과 거주상황은 여전히 안개에 쌓여 있다.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질 않은 것이다. 각종 자료에는 분명히 1900년대 초 미국 땅에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서부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적혀져 있지만 그들이 어디고 옮겨갔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솔레이크(Salt Lake City) 시립묘지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시립묘지는 매장된 사망자들의 명단을 보관하고 있다. 우선 미 중서부의 교통요지이면서 인근에 코네컷 광산등 많은 광산이 있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던 솔레이크 시의 시립묘지를 대상으로 한국인들의 자취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유타주의 수도인 솔레이크 시티의 시립묘지에는 1847년부터 사망자가 묻히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사망자의 신상명세가 자세히 쓰여진 매장자 카드를 관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매장자 명단에서 한국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일단 선별하고, 이들의 묘석을 통해 사망일자를 알아내면 한인들이 언제 미 본토에 도착했는지에 대한 추정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매장자 대장은 모두 7권이었으며 2천161장에 10만3천925명의 사망자(매장자) 명단이 실려 있었다.
각 대장별로 평균 1만2천-1만6천명의 사망자들의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기재돼 있었고 생년월일을 비롯, 사망일자, 장례일자, 출신지, 출신국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며칠동안 대장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한국인으로 추정될 수 있는 매장자는 단지 몇 명에 불과했다. 매장자 대장에 출신국가가 조선(Korea)이라고 기록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장에 쓰여져 있는 영문 이름상의 성이 Lee(이)나 Park(박), Kang(강)처럼 한국 고유의 성과 같거나 비슷한 사망자들 몇 사람이 일단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매장자로 분류됐다.
숙고를 거듭한 분류작업을 끝내자 한국인으로 추정될 수 있는 매장자는 모두 13명이었다. 이중 ‘리’ ‘백’ ‘박’ ‘소’와 같은 성을 가진 5명은 1895년에서 1896년 2년 사이에 모두 장례가 치러진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한결같이 생년월일이나 국적이 불명인 상태이며 단지 장례날자만 적혀져 있었을 뿐이다.
매장자 명단에 함께 쓰여져 있는 묘지의 장소를 찾아 갔지만 현지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돌비석도 하나가 남아있질 않은데 그 무엇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이런 탓에 솔레이크 시립묘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한국인들의 자취는 매장자 명단에 남아있는 이름뿐이다.
가장 빨리 솔레이크 시립묘지에 매장된 이는 1895년 9월 10일 장례를 치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 Peck. C. A.(백모씨)이다. 백씨가 사망한지 불과 나흘 뒤인 9월 14일날 Lee Goon(이군)이라는 사람의 장례가 치러졌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이 두 사람이 같은 광산이나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 고통받다가 며칠 사이를 두고 차례로 숨져갔을 상황을 설정해볼 수 있다. 1896년 2월 15일과 24일, 각각 장례가 치러진 Sow(소씨)와 Park(박씨)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소 무리한 추측이라는 생각도 드나 각종 광산사고가 빈발했던 당시 유타주 일대의 상황을 감안해 보면 전혀 불가능한 경우도 아니다.

**코네컷 동광산과 411명의 한국인 광부**
한국인들의 미국이민 시기가 18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가설에 대한 검증연구와 함께 병행됐던 것이 유타주를 비롯해 와이오밍, 네바다, 아이다호주 등 미 중서부 산간지방에 남겨진 한국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이 부분의 연구는 이정면 교수가 지난 1995년 3만여장의 코네컷 광산 고용자 카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40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유타주에서 광산근로자로 일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미 중서부지역 최대 노천광산인 코네컷 빙험캐년 동(銅)광산에서는 1906년부터 채광이 시작됐다. 이 코네컷 광산에서는 46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광부들을 고용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작성했는데 성만 기록하고 이름은 이니셜 처리했다.
이 코넷컷 광산 회사는 1906년 이후의 고용카드(Employment Card)를 최근 유타 대학교에 기증했다. 이 고용카드는 노동자들의 각종 신상명세서와 고용·퇴직일자를 적어둔 것이다.
이 교수는 유타대 도서관에 보관된 수만 장의 고용카드를 꼼꼼히 조사한 결과 1909년부터 20년까지 10년 동안 코네컷 광산회사에서 일했던 한인들은 모두 411명이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놀랐던 사실은 출신 국가를 코리아 또는 코리아, 전라도라는 식으로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고용카드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다. 비록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나의 조국은 분명히 코리아라고 주장하는 선인들의 목소리가 카드에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Lee(이씨), Park(박씨), Kang(강씨) 등의 성이 적혀진 이 카드에는 개인별로 영어를 약간한다. 나름대로 의사가 통한다는 기록과 함께 전 근무지와 입사일자, 퇴직일자, 일당 등이 비교적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이와함께 개인별로 나이, 체중, 신장, 눈과 머리의 색깔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교수는 이같은 기록을 근거로 이들이 하와이나 LA,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온 노동자들로 간주하고 있다. 고달픈 하와이 농장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서부로 건너온, 별다른 기술도 없고 몸뚱아리가 전재산인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광산지역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캐머러 광산과 신씨**
1926년 유타주와 와이오밍주 경계에 있는 캐머러(Kemmerer) 광산에서 발생한 탄광화약고 폭발사고로 8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희생자중 한 명이 바로 한국인인 신씨(Shin. B. M.)이다.
이 교수는 지난 1995년 7월 21일,신(申)씨의 묘가 있는 캐머러 묘지를 찾았다. 신씨의 묘비에는 조선인 고신지묘 (朝鮮人 故信之墓)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신(申)자가 신(信)으로 잘못 새겨진 것은 이 묘석을 일본인들이 세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고가 발생한 6번 탄광에는 상당수의 일본인 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신(申)씨라는 성을 자신들이 성씨를 표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신(信)씨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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