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희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운동 마무리로 마사지 벨트 기구를 이용하던 중이었다. 나란히 두 개의 기구가 있었는데 한 쪽 기구에 휴대전화를 올려놓은 채였다. 허리께에 벨트를 걸치고 작동시키니 온 몸에 지진이 일어난 듯 달달거렸다. ‘시원하다’를 연발하다 옆을 보니 진동의 여파로 내 전화기가 심하게 흔들리며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얼른 집어 들어 멀찌감치 옮겨놓고는 다시 마사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진동의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두었는데도 전화기가 또 달달달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었다. 기구 작동을 멈추고 나서 비로소 나는 자각할 수 있었다. 운동기구 진동의 여파는 애당초 없었다. 다만 내 몸이 떨리니 주변까지 온통 달달거리며 떠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이 6살 때였다. 하도 숫기가 없어서 웅변학원에 보냈다. 평소 말수도 적고 소극적인 편이었는데 얼마 후 대회까지 나가게 되었다. 내가 더 떨렸다. 아이는 극성엄마의 요구대로 연습해주었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무대 위 대기석에 앉아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산만하게 몸을 비틀어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내 아이는 앞만 보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쟤가 긴장을 했구나.’ 싶었다. “이 꼬마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를 끝으로 아이가 웅변을 마쳤다. 아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나는 온몸에 힘이 쫙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떨리지 않았냐는 내 물음에 아이가 대답했다. “떨리는 게 뭔데?”
커뮤니케이션 학자 맥크로스키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 떠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내가 말을 하고 난 후의 결과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리 걱정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말할 내용에 대해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욕심과는 달리 꼭 상을 타야한다는 결과에 대한 부담이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그러니 6살 연사는 떨 이유가 없었던 거다. ‘떨리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은 아이를 두고 걱정했던 것은 내가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유명한 일화다. 한양 천도를 마치고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다 이성계는 군신의 예를 떠나 터놓고 농담을 하자고 제안한다. 요샛말로 치자면 계급장 떼고 ‘야자타임’인 셈이다. “대사, 제눈에는 대사의 얼굴상이 꼭 돼지로 보입니다.” 라고 태조가 건들자, 무학대사는 전혀 발끈하지 않고는 “전하, 제눈에는 전하의 모습이 꼭 부처로 보입니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돼지라 욕을 했는데 성나지 않느냐는 이성계의 반문에 무학이 명대사를 남긴다. “돼지 눈에는 모든 게 돼지로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만 보인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이 그것이다.
돼지가 될 것인가, 부처가 될 것인가?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수많은 돼지가 들끓고 있다. 어차피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니 나도 그 중 한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누가 봐도 돼지인데 스스로는 부처인 줄 안다는 것이다. 돼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부처이니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살이는 답답하다. 답답하다 못해 무섭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갖은 답이 돌아온다. 사람들은 귀신이 무섭다고도 하고, 죽음, 높은 곳, 발표, 돈 등을 든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무섭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것이다.
21세기 경영학자들은 이 시대의 역량 있는 사람들이 갖춰야할 덕목 가운데 공감능력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공감능력이란 상대의 감정이나 기분 상태를 빨리 파악해서 대처해주는 능력이다. 내가 배부르다고 상대도 배가 부를 것이라고 여겨서는 소통할 수 없다. 그러다가 돼지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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