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찾기한인 미국 초기 이민자들의 항일 독립운동과 나라사랑

오늘에 되살려야할 구한말 미국 이민자들의 나라사랑
짐승취급 받으며 애써 모은 품삯,동포·조국위해 쾌척
하와이·네브라스카에 군사학교 설립 독립투지 불태워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 살길 찾아 만주와 하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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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구식 군인들의 군사훈련 모습. 일본은 구한말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신식 군인들을 훈련시켜 조선 침략의 도구로 삼았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밝은 미래를 찾아가는 지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올바르게 기록돼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명쾌하지가 않다. 절대적인 사료부족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그릇된 사관(史觀)이 아직도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고 우리사회가 계층별로 갈등구조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사관의 영향이 크다.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일제의 지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과 부정을 넘나들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일제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빚어진 현상이다.

일본의 발호가 거센 지금, 극일(克日)이 국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려만 가득할 뿐 실천가능한 방법론 제시는 미흡하다. 일본에 맞서 싸웠던 선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크다. 특히 쓰러져 가는 조선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나갔던 조선말기 한인노동자들의 미국에서의 나라사랑 삶은 우리들이 찾아가야할 좌표를 명확히 제시해주고 있다.

본지는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1900년대 미국 하와이와 미 중서부 일대에서 생활했던 한인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했다.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처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실천은 위대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박용만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쓰러져 가는 조선(1)

조선의 보빙사
1883년 미국으로 파견됐던 조선의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라 불려졌다.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미국인),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중국인), 뒷줄 왼쪽부터 현홍택, 미야오카(일본인),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조선은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려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삼아 조선 침략을 묵인했다.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됐다.

조선 말기는 세도정치가 횡행하는 시기였다. 탐욕스런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세금제도의 기본인 전정(田政)과 군정(軍政), 환곡(還穀)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변질돼 버렸다. 순조, 헌종, 철종 등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조선의 국력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세도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고 각종 부정과 부패를 일삼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됐다.

매질과 수탈에 지친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됐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생겼다고 생각한 백성들은 조정에 맞서 봉기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났다. 백성들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터진 민란이었다. 지배층은 이 민중봉기를 ‘난(亂)’으로 인식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정당한 항거이자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1862년에 경상(慶尙)과 전라(全羅), 충청(忠淸) 등 삼남(三南)지방에서 대규모 민란이 발생했다. 이 때부터 1894년까지 조선 땅에서 발생한 민란은 무려 48회에 달했다. 1862년 한 해동안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민란은 모두 37회였다. 함경도 등 조선 북부지역에서도 많은 민란이 발생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민란에 가담한 백성들은 관군에 잡혀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백성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로 도망갔다. 1860년 이후 1910년까지 일본과 중국 동북부, 러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간 한인들의 수는 44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때마침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쇄정책을 폐지하고 이주민들을 만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유민들은 만주지역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1889년 만주 땅에는 약 3만4,000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阿片戰爭)을 일으켜 중국을 개방시켰으며 1854년 미국은 일본을 불평등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시켰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조선을 개방시키기 위해 수차례 군대를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丙寅), 신미(辛未)양요(洋擾)이다.

미국은 1866년 조선군이 불태워버린 제너럴 셔먼호 배상을 요구하며 5년 뒤인 1871년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 모습.
1866년 7월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상선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등 조선군 수비대는 셔먼호를 공격해 불태워 버렸다. 이 때 셔먼호 선원과 영국인 선교사 등 24명이 죽음을 당했다.

이 뒤에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인 신부와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데 대한 책임과 배상을 요구한 병인양요가 벌어졌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의용군을 모집해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1871년 4월 8일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보상을 요구하며 군함 5척과 1천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이 사건이 신미양요다.

쇄국정책을 고수해오던 조선은 결국 서구열강과 일본의 강제로 인해 문호를 개방한다. 1875년 고종 12년 4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인천 월미도 바다에 출현해 조선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며 1876년 강제로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을 맺는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고 불평등했다.

조선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각종 조약을 맺었고 부산, 원산, 인천 등 주요 항구도 개방했다. 항구개방과 함께 서구 열강의 각종 생활용품들이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조선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 아래 일본의 경제침탈은 치밀하게 진행됐다.

/h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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