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의 한인소년병학교(下)일제의 압력에 문닫은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

日本 영사직원 외교문제 삼겠다며 美 대학 압박
6년간 170명 등록 40여명 졸업, 민족일꾼 배출
박용만 선생 영향…헤이스팅스대 한인유학생 많아

 

▲ 박용만 선생과 조국 광복의 뜻을 키워갔던 네브라스카주 커니시,헤이스팅스시,링컨시 일대 한인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의 모습.농장과 대학내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대학에 있었던 소년병학교는 1914년 8월에 있었던 졸업식을 끝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된다.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는 박용만 선생이 1912년 11월 하와이로 떠나면서 존립상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박처후를 비롯한 한인들이 힘을 모아 소년병학교를 잘 이끌어가 이후로도 매년 20~30명이 입학을 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년병학교가 문을 닫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의 방해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들이 세운 군사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1908년이었다. 그해 9월 시골도시 헤이스팅스에서는 비행기가 처음으로 하늘로 오르는 행사가 열렸다. 커티스 복엽기가 헤이스팅스대학 운동장에서 시험비행을 한 것이다.

이 행사에는 네브라스카에 살고 있는 미국인 4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때 헤이스팅스 30마일 북쪽에 있는 그랜드 아일랜드(Grand Island)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일본인들이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군사시범을 보게 됐다. 일본인들은 깜짝 놀랐다. 수소문 끝에 시범을 보인 50여명의 조선인들이 헤이스팅스 대학 건물에서 살며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본인들은 이 같은 사실을 3년 뒤 순회강연을 하기위해 네브라스카를 찾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총영사관 이누이에게 알린다. 이누이는 실상을 파악한 뒤 헤이스팅스 대학 크론(Krone)학장에게 항의하고 한인소년병학교를 폐교토록 종용했다. 이누이는 폐교조치하지 않으면 외교문제를 삼겠다고 헤이스팅스대학측을 압박했다.

기자가 헤이스팅스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누이의 항의문서는 1914년 10월 27일자로 작성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 이누이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됐는데도 귀 대학 측이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조선인들에게 대학건물을 제공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토록 허용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당장 중단해줄 것을 바란다”고 요구하고 있다.

▲ 네브라스카주 한인 소년병 학생들이 장총을 들고 사격 훈련에 임하고 있다.

헤이스팅스 대학 측은 이 문제가 미·일간의 외교문로 비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대학 측은 회의 끝에 ‘소년병 학교에 대학건물과 농장을 더 이상 임대해주기 곤란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일본 측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소년병학교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6년 동안 170여명의 학생들이 등록하고 40여명이 졸업한 소년병학교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나 커니 시와 헤이스팅스에 있었던 소년병학교는 해외항일투쟁의 근간이 되는 한편 역량있는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해외최초의 무관양성학교였던 소년병학교는 신흥무관학교설립과 운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학교 운영에 참여했던 문양목, 박장순, 이명섭, 남정헌, 방사겸, 정태은, 김원택, 신형호 등은 국권회복운동은 물론 재미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또 소년병학생 출신인 정한경, 유일한, 한시호, 신형호, 홍승국, 김용성, 김현구 등도 한인사회의 지도자나 조국경제부흥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 헤이스팅스대 재학중 사망한
윤치오 아들 윤왕선.

헤이스팅스 대학은 박용만 선생의 지도아래 공부를 배우고 군사훈련를 받고자 했던 한인유학생들이 많았던 관계로 이후로도 이 대학을 찾는 한인유학생들이 많았다. 대한제국 학무국장과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오의 아들 윤왕선도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윤왕선은 1923년 가을에 헤이스팅스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윤왕선은 22살 되던 해인 1926년에 폐렴으로 사망해 헤이스팅스 파크뷰 시립묘지에 묻히게 된다. 윤왕선의 형인 윤일선(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1937년 헤이스팅스 대학을 찾아와 동생의 장례를 치러주고 묘역을 잘 관리해준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친일파의 아들이었던 윤왕선이 항일투쟁의 본산이었던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공부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가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 출신이라는 점은 본보 2014년 10월 20일자 5면 ‘네브라스카 커니시의 한인소년병학교(下)’ 12회에서 밝힌 바 있다. 소년병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헤이스팅스 대학에는 많은 한인들이 찾아와 공부를 했다. 그 중 한명이 故 유창순(劉彰順)국무총리다. 유 전 총리는 1949년부터 두 학기동안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헤이스팅스 대학에는 4~5명의 한인유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 선생은 1913년부터 한인자치제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대한인국민회 자치규정을 만들고 하와이지방정부에 하와이지방총회를 법인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와이 주정부는 국민회하와이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하고 특별경찰권까지 부여했다.

경찰권까지 확보하면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하와이지방총회가 임시정부의 기능을 맡았기 때문이다.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이 일본정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행사한 것은 박용만 선생의 지도아래 있던 하와이 한인사회가 처음이었다.

선생은 국민의무금 제도를 도입, 모든 한인들에게 납세의무를 다하도록 했다. 이 제도에 따라 한인들은 매년 5달러를 납부해야 했다. 이중 50센트는 중앙총회자금으로 보내졌고 나머지 4달러 50센트는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사용했다. 이 제도로 인해 하와이지방총회 재정은 넉넉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박용만 선생은 하와이에서 재차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kjhyuckchoi@hanmail.net
 

▲ 헤이스팅스 데일리 트리뷴지에 소개된 한인소년병 학교 기사. 매우 비중있게 실려있다.
▲ 일본총영사관 이누이가 헤이스팅스大에 보낸 소년병학교 관련 항의 서한./헤이스팅스大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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