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사상, 4개 열강 극복전략으로 삼아야17. 박용만선생의 생애와 평가(下)

애국·애족으로 新국가…힘 있는 나라건설 강조
만주에 새로운 조선 건설하기 위해 美·日 이용
이해명 저격 받아 절명…정당한 역사평가 받아야

 

▲ 박용만 선생은 1914년 하와이 아후이마누 농장에서 대조선 국민국단을 결성했다.대조선 국민국단은 둔전병제에 입각한 공동체 생활로써 함께 생활하며군사교육을 받는 형태였다. 대조선 국민군단에 가입한 한인 노동자 수는 많을때는 400여명,적을때는 200여명에 달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대조선 국민군단을 가리켜 ‘산넘어 학교’라 불렀다. 사진은 아후이마누 대조선 국민군단 교관들과 박용만선생(앞줄 중앙)의 모습이다. /한애라씨 제공

박용만 선생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것은 그곳에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자신의 뜻에 맞는 독립지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한달 뒤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국내 및 해외 각지에 국민군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구상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와 맞지 않았다.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피선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와 결정적으로 틈이 벌어진 것은 임정수반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에 건의했던 ‘조선위임통치 청원’을 임시정부가 추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상하이로 대신 베이징으로 가서 김가진 등이 조직한 대동단의 무정부장(武政部長)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에 임시정부는 1920년 4월 국무원회의를 열고 박용만 선생을 의원면직 처리했다.

이후 선생은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군자금을 지원받으려 했으나 결국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 선생은 베이징 교외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농장을 세우려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1925년 하와이를 방문해 한인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은 하와이에 1년을 독립군기지 개척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만주·시베리아·몽골 등지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쏟았다.

▲ 박용만 선생이 스스로 고안한 군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선생은 군사력만이 조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한인들을 규합해 힘을 키우는데 주력했다.뿐만 아니라 각종 저술을 통해 세계 정세를 널리 알리고 조선인들의 단합을 이끌어 내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용만 선생은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의 저격을 받아 절명한다. 이해명이 어떤 동기로 박용만 선생을 살해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해명은 박용만 선생이 변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말을 사실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렇지만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던 박용만선생의 의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선생은 1919년 이후 줄곧 중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독립을 쟁취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 공산당이 조선독립군 600여명을 학살한 ‘자유시 참변’을 지켜본 뒤 러시아 공산정부의 위험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게끔 모종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변절자로 오해 받게 된 배경으로 여겨진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 발생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붉은 군대(赤軍)가 스보보드니에 집결해있던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것으로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거나 1800여 명이 실종·포로 상태가 됐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 조선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궤멸됐다.

자유시사변은 조선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의 공격에 의해 벌어진 참변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조선독립군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일본군을 연해주 일대에서 철수시키려는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결과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독립군 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박용만 선생은 자유시 참변을 목도하면서 러시아 공산당의 잔학성을 절감하게 되고 단기적으로는 일본을 이용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판단된다. 선생은 미국을 설득해 만주지방에 또 하나의 조선국을 설립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미 정부 고위인사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이 같은 구상을 실현하기위해 박용만선생은 중국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일본 측과도 비공식접촉을 가졌는데 앞서 지적한 대로 이런 부분이 오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용만선생을 폄훼하는 인사들은 ‘조선총독 밀회설’등을 제기하고 있으나 선생의 전체적인 삶이나 소신을 살펴보면 이는 선생의 참뜻과 조국사랑으로 일관한 그의 삶을 왜곡한 것으로 생각된다.

▲ 대조선 국민군단이 있었던 아후이마누 농장 입구. 윗사진 교관들 뒤로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산능선이 이사진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다. 아후이마누 농장은 주택가로 변해버려 예전에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후이마누에 있었던 대조선 국민군단은 1915년 카후쿠에 있는 농장으로 옮겨졌다.

조국의 독립과 조선민족의 각성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박용만 선생이 훗날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와 대척점에 서 있던 그의 독립투쟁노선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군사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일본, 미국이라는 강대국 틈에 끼어있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점이다. 지금까지는 박용만선생의 삶을 미국 본토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회부터는 하와이 한인사회를 무대로 펼쳐졌던 그의 삶을 소개할 계획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선생의 활동상은 다른 자료나 책을 참조하시기를 권해드린다. 기자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현지 취재에 나섰던 곳은 미국지역에 불과하다. 현장취재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어설픈 지식으로 선생의 삶을 전하는 것은 자칫 누가 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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