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천명 영광동학군 일본군·관군과 치열한 전투
日軍, 신하리 가축시장에서 농민군 집단처형
우지개 씌워 들기름 부운 뒤 산채로 태우기도
가족들 체포피해 제주도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영광은 동학의 세가 매우 컸다. 이는 동학농민군의 2차 기포가 실패로 돌아간 뒤 그만큼 피해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학농민군의 2차 기포 당시 영광에서는 오하영과 오시영이 8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일어섰다.
이 때 수많은 농민군이 일본·관군 연합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일본군은 유족들이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게 지금의 영광읍 신하리에 있는 가축시장에서 부근에 무더기로 화장해 버렸다고 전해진다.
그 장소는 지금의 축협 주차장으로 추정된다. 정택근씨는 일본군에 체포된 상당수 농민군이 집단처형 당한 장소로 이 곳을 지목하고 있다. 일본군들은 농민군을 포박한 상태로 비올 때 사용하는 우지개를 머리에 씌우고 기름을 부은 뒤 불을 붙여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광군지는 소설가 문순태씨가 1985년 3월께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던 송문수의 후손 송정호(宋政浩)씨를 만나 채록한 증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우리 종가 집 아제가 동학군 영광대장을 했는디, 그 한 분 때문에 문중이 파손되어 부렀소. 객사에서 동학군 훈련을 시키면서 법성포에 수거해 놓은 세미를 군량미로 써 부렀으니 온전했것소? 송문수는 이 일로 인하여 뒷날 역적으로 몰려 <사장터>라 불리는 곳에서 효수 당했다고 하며, 송문수 집안은 결국, 우리 집안은 결국 그 일로 제주도로, 북쪽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영광에는 우리 집 밖에 없어요. 우리 부친은 가까운 파평 윤(尹)씨 처가로 피난을 해서 무사했답디다.”
영광 출신 농민군지도자로서 체포되거나 처형당한 농민군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영광군 도내면 고성리(古城里) 출신인 서우순(徐佑順)
1894년 10월에 무장 장재면(長才面) 남계리(南溪里)에 사는 오응문(吳應文)을 통해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12월 5일 함평 출신 농민군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영광 동부면 출신 농민군지도자 양경수(梁京洙)
11월 20일 영광읍내의 향리들이 수성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자 영광읍을 다시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12월 3일 영광 읍내에 거주하는 진사 김응선(金應善)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성군에 체포돼 12월 5일에 처형당했다.
· 영광 홍농면과 법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송문수(宋文洙)
송문수와 함께 농민군지도자로 활동했던 이현숙(李玄淑)에 의해 12월 5일 체포돼 효수 당했다. 영광 홍농면 출신의 이현숙은 법성포의 진리(鎭吏)로 갑오년 봄에 동학에 들어가 오래 몸담은 사람보다 더 동학교도 행세를 잘하고 농민군 행세를 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오시영을 잡아 관군에게 넘겨주고 큰 상을 받았다고 전한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홍농면에 사는 이현숙은 의병을 많이 일으켜 동학괴수 송문수를 체포하여 머리를 잘라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으며 그 공로로 선봉진 별군관으로 임명됐다.
이외에 송문수와 함께 활동했던 농민군지도자 오태숙(吳泰淑)역시 12월 5일 체포돼 효수 당했다. 최준숙(崔俊淑)등 9명도 역시 포살되었다. 박인지(朴仁之)등 10명은 장위영병에 체포됐으며 12월 12일 무장에서 체포된 송진팔(宋辰八)등 18명은 영광으로 압송돼 경중에 따라 처벌됐다.
1895년 1월 20일에는 법성진의 동학농민군 남궁달(南宮達) · 박복암(朴卜(巖)등이 체포돼 나주에 있는 우진영(右鎭營)으로 압송됐다. 또 같은 날 영광지역 동학지도자급인 오홍순(吳弘順)과 이만순(李萬順), 김풍종(金豊宗)등도 체포돼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