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광주의 노무현 대선 후보 선택은 위대했다”
<남도일보 K포럼 염동연 前 의원 특강 요약>

盧 대통령 임기동안 “쓴소리만 하겠다”약속 지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내 모든 걸 바쳤다" 회고

▲ 염동연 전 국회의원이 2일 오후 라마다 플라자 광주호텔 5층 연회장서 열린 제1기 남도일보 K포럼 11번째 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제1기 남도일보 최고경영자(CEO) 아카데미 강좌인 K포럼이 2일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라마다 플라자 광주호텔 5층 연회장에서 염동연 전 국회의원을 초청, 2학기 개강 강의를 진행했다.
염 전 의원은 이날  ‘2002년 3월 광주의 선택’이란 주제로, 남도일보 K포럼의 11번째 특강에 나섰다.

<다음은 특강내용 요약>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세 도중 노무현과 만남
나는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말 오랜기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내 모든걸 다 바쳤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 97년 12월초, 당시 소위 말해 대통령선거의 분위기는 김대중 후보가 이길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IMF와 연대, 이인제의 경선 불복하고 독자 출마 등의 내외부 요인이 매우 당선 가능성을 높여줬고,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울산지역에 사무부총장으로서 울산에 나가서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12월초 노무현 부총재가 울산을 선거 유세차 내려왔다.
그런데 선거유세를 하고 올라가야 되는데 김포공항에 눈이 오면서 기상악화로 인해 노무현 부총재가 서울로 올라갈 수가 없게 됐다.
이날 저녁에 광주출신의 기업인 공장에 가서 근로자들 1천여명에게 전부 인사를 나누고, 저녁에 노무현 부총재와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부산과 경남에서 가장 대우하는 정치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 선거분위기를 보면 이번에 드디어 우리 김대중 후보가 승리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곧바로 노 부총재에게“다음에 누군가가 준비해야 하는데 노 부총재 당신이 준비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어 “호남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나라당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며“호남은 만약에 당신이 나서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전했다.
또 “영남에서 가져온 한 표는 두 표라고 생각하니 열심히 하시오”라며 “그렇게 되면 제가 내 모든 힘을 다해서 당신을 돕겠다”고 했다.

◇노 대통령의 임기 동안 한번도 좋은 말 안해
사실 나는 노무현과의 인연이 지난 90년 3당 합당때부터 시작됐다.
노무현은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우리당에 들어왔다.
나는 노무현과 수시로 만나며 7,8년 가량 친하게 지내왔다.
그런 와중에 지난 2000년 9월 중순, 노무현이 해수부장관을 하고 있을 때이다.
노무현이 면담을 요청해 집무실로 찾아가니 첫 마디가 “우리 둘이서 세상을 바꿉시다”였다.
그는 "대통령 경선에 나가겠다"며 “염 총장님이 캠프의 총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캠프의 자리를 맡는 조건으로 3가지를 물었다.
우선 "김대중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많이했지만 정치적으로 적임자”라면서 “만약 내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하면 특히 민족과 외교,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문을 항상 받겠다”고 답했다.
이어 "돈이 많냐"고 물었다.
당시에는 대선에서 국가가 선거 보조를 해주는 제도가 없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의 경우에도 최소한으로 100억에서 20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
그는 “나처럼 돈 많은 사람이 없다”면서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보내주고 있다. 내가 투명하게 경선하고 승리로 보답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실 벤처기업 50개가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며 “그 관리를 지금 비서가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쓴소리만 하겠다”고 강조했다.
실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동안 한번도 좋은 말을 안 했다.

▲ 제1기 남도일보 최고경영자(CEO) 아카데미 강좌인 K포럼 2학기 첫 번째 강의가 2일 오후 라마다 플라자 광주호텔 5층 연회장에서 열리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경선, 광주에서 기필코 승리, 승기는 울산서
노무현 대선캠프 당시‘서울에서 결판난다’는 각오로 힘썼다.
특히 광주에서는 꼭 이겨야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당에서는 국민의 50%를 신청을 받아 당원 50:국민 50으로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사실 2년이 넘도록 한명도 노무현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경선을 한달여 앞두고 유일하게 천정배 의원이 노무현을 돕겠다고 나섰다. 나는 당시 광주보다 울산에 중점을 두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영남지역에서 노무현이 후보로 나오면 30표 이상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확률이 높을 것이란 전략을 세웠다.

호남의 선택기준은 울산의 표가 될 것이라 전략인 것이다. 이에 어떤 경우에도 울산에서는 노무현이 1등해야만 했다.
노력의 결과가 울산에서 승리했다. 사실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의 승리는 예견됐었다. ‘영남에서 표를 가져올 후보’는 노무현뿐이었다.
특히 한나라당에 다시 정권을 빼앗길 수 없기 때문에 노무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내는 만약 광주에서 1등을 못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했다. 물론 나의 호기스러움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자신감도 있었다.
또 광주의 경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한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광주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광주에 올인했다.
당시에 지역의 리더들이 노무현 지지를 산발적으로 하게 만들었고, 물론 많은 설득도 병행했다. 혼신의 노력 끝에 변호사, 의사, 언론인, 자영업자 등 각계각층이 움직이면서 그 결과 광주가 노무현을 선택했다.

◇노무현 집권 초기 호남사람 대거 발탁
노무현이란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인재 풀이 없었다.
노무현 초기에 호남사람들이 대거 발탁됐다.
심지어 노무현 당선자는 청와대 비서실장, 수석, 총리장관까지 많은 사람을 등용했다.
노무현에게 ‘호남에 대거 인사특혜를 줘라’ 말했다. 불행하게도 구속이된다. 소위 보수언론들은 북장구치고 국민들은 뭘 그런가 그랬다.
그래서 안희정과 내가 청와대에 입성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광재는 얼마 못가 물러났다. 러시아 유런게이트사건 특검까지 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한나라당 공세에 의해서 특검까지 했다.
결국 호남사람인 나와 애정을 갖고 있던 안희정과 이광재가 못 가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사람들이 나한테 뭘 가장 기대를 할까요?”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호남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릴만한 무언가를 물어 “인사권을 호남에 맡기면 고구마뿌리처럼 쫙 내려갈 거 같다”고 전했다.

◇그런 노무현이 변했다.
49명 비서관 중 20명이 호남지역 인사였으나 어느 날 보니 2명 남지 않았다. 광주·전남 민심이 떨어져 나간 이유다.
공사 사장이나 감사를 인사수석이 추천하면 꼭 민정라인에서 스크린이 됐다.
영남사람은 좋은 것을 부각시키고 호남사람은 나쁜 것을 부각시켰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이 변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에게 권력구조 개편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02년 3월에 광주선택은 ‘시대정신’이었다.
광주 학생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연장선상에서 광주가 노무현을 선택한 것이다.
비록 국민들의 기대가 어긋났지만, 노무현은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무현은 보답하지 못했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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