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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신의 소설 ‘이카루스의 강’

<15·밀운불우(密雲不雨)>-12

이윽고 장시간이 지나자 온순해진 용은 모든 것을 분출하며 순영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독사는 애절한 눈빛으로 순영을 바라보며 “미찌코, 아까 온 전화가 누구야?”“알 것 없어요. 상열씨!”

“혹시 최 장관 아닌가? 아니 지금은 최 의원이지!”“그걸 어떻게…. 요즘 자주 전화 와요. 양평 별장으로 와 달라고…. 자꾸 괴롭혀요.”

순영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다 독사를 올려다봤다.

“그놈이 미찌코 자넬 괴롭히다니 내가 가만있으면 안되겠군. 이제껏 최 장관의 약점은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친구 형님으로 깍듯이 대하니까 뵈는 게 없는 것 같아!”

“상열씨 그러지 마세요. 그분 무서운 분 같아요. 함부로 나서면 상열씨가 위험해질 것 같아요.”

“아니야 미찌코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너무 걱정 하지마! 나 이래봬도 건달이야!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아!”

순영은 더는 독사에게 치우의 비리를 캐묻지 않았다. 조만간 단순한 독사의 입을 통해 최치우의 그동안의 악행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춘삼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 어느덧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아버지 이 회장이 남긴 동영상 테이프를 볼 용기가 나지않아 서재 중앙에 남겨두었다. 부모 자식과의 운명적인 인연과 인생을 살면서 맺은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춘삼의 뇌리를 스치며 얼굴엔 잔주름이 늘어나 있고 머린 반백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서재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춘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중앙벽체에 동영상 테이프를 만지작거리다 작심이라도 한 듯 기계에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쉼 없이 돌아가는 테이프 소리의 지직거림과 이정길의 병약한 모습에서 나오는 삶의 회한(悔恨)과 어미 윤희를 향한 애절한 사랑가가 구구절절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서재 방에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아비와 춘삼의 만남이 이어졌으며 춘삼의 얼굴에는 온통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인 채 그들 사이, 무언의 대화만이 남아 있을 무렵 유리창 너머 여명의 새벽빛이 서재에 앉아있는 춘삼의 얼어붙은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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