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북한의 남침(南侵)과 66주년 6·25동란<上>
<오인철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공산군의 남침(南侵)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개성市 동쪽에서 38선을 넘어 南으로 쳐들어 왔다. 당시 38도선 건너편엔 전력(戰力)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한국군 4개 사단이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초는 이런 불법남침이 단순한 경계선 침범인지도, 안그러면 전면전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지만 오전 6시 30분에는 공산당의 전 병력을 동원한 남침(南侵)같다는 속보가 경무대에 보고되었다. 아아, 어찌 그 참상을 잊겠느냐.

당시 우리 농촌 출신 장병들 대부분이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서 보름간 휴가를 떠났다. 그날 밤 벌써 숫자로도 열세해 있던 한국군 전선은 위험천만 병력(兵力) 고갈 상태였다 한다.

게다가 허위 남침 경고가 너무 잦았기에 전선의 일부 지휘관들은 육군회관 개관 파티에 참석하러 국방부 고위 장교 대부분도 서울에 와 있었다 한다. 그러나 하늘마저 우리를 버리셨겠느냐, 아니다.

때는 하얀 하지 감자꽃 피고 초여름으로 물들어 가는 남한(南韓) 산천은 돌발적인 표연으로 자욱했고, 너무나 성급한 당시 정황은 온 국민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언제고 우리 편은 하나님이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족하나마 현재 우리네 전력(戰力)으로라도 어떤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공산군 침략자를 격퇴,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그야말로 꼼짝없이 한국군은 불의의 습격을 당했다. 물자도, 무기도, 군인도 중과부적인 남한(南韓)은 참 어이없게도 적군(敵軍)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여태껏 형편으로 미뤄봐서 미국(美國)이나 UN으로부터 원조나 구호품이 도착한단 건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방위선에서 조차도 제외한 판국이었다. UN의 전례로 봐 신속하고 결정적 행동, 반격도 취해질 가능성도 희박했다. 훗날 공산당 남침에 대응한 이 대통령의 정책과 행동을 비판하는 얘기가 많았지만, 당시 남한 실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급박한 형편이었다. 혼자서라도 과감히 공산 침략에 대응하려는 그의 결심은 자유세계를 놀라게 했고, 소련 제국주의 거친 물결을 막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지면(紙面) 관계상 거두절미코 무자비한 북한 괴뢰 남침으로, 순식간에 한국군 당시 9만3천600명 병력 50%가 최초 공격당한 수시간 불과의 전투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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