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난 후

추석이 지난 후

<문상화 광주대학교 국제언어문화학부 교수>
 

고기가 먹기 싫어졌다. 어제까지도 맛있게 먹던 소고기며 돼지고기이지만 갑자기 고기냄새가 싫다. 고기를 굽는 냄새도 싫고, 날고기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도 역하다. 익은 고기 냄새가 불쾌할 정도면, 날고기의 비릿한 피 냄새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육식을 멈추고 채소만 먹는 것이다. 그래야 고기에서 연상되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테니까. 나는 세상에 외친다. ‘이제부터 고기 안 먹을 테니까 제발 먹으라고 하지 마세요.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싫어요.’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내 뜻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불행의 시작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 여성이 육식을 금한 후에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는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고기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주인공 ‘나’는 금육을 시작하고 동물성 단백질이 제거된 식탁은 주인공의 기력을 쇠진시킨다. 그리고 금육을 해석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다른 해결책이 제시된다. 부인의 금육을 이해하기 힘든 남편, 자식이 쇠진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부모, 자신의 안전망 속에서만 머무르고 싶은 언니, 그리고 타인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형부. 주인공 ‘나’의 금육을 이해하기 힘든 가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방법으로 주인공의 금육을 중지시키려고 하고 그 결과는 당연히 비극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독자들에게 ‘채식주의자’는 이 소설 속의 익숙하지 않은 소재로 인해 자칫 거부감이 들기 쉬운 작품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고기를 밀어 넣고, 후에 정신병동에 입원한 주인공에게 의사는 튜브를 이용해 강제로 죽을 위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아버지는 딸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하고, 의사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점에 소설과 일상의 접점이 있다. 평생을 자식들에게 헌신했던 소설 속의 아버지처럼, 우리는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타인의 복종을 요구하기 쉽고 이는 당연히 갈등을 유발한다. 그것이 표출되는 일반적인 형태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와 “제가 언제 원했어요?”이다.

추석에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는 반가움만큼이나 서운함이 표출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가족들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할 기회가 줄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훈련이 여지없이 줄었다. 그러다보니 자기중심적 태도가 가족 간의 불편한 감정을 촉발하게 된다. 굳이 “취직해야지!”, “결혼할 나이가 지나지 않았나?” 같은 금기어를 예로 들지 않아도, 금년에도 예외 없이 여러 가족들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불화를 겪었을 것이다.

가족 간의 불화, 즉 가족을 서운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형태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폭력의 근저에 이기심과 편견이 존재한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 간에 자신의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면 상대방이 무엇을 원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것을 모른 채 자신의 진심만을 강요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 딸의 입을 강제로 열고 고기를 밀어 넣는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딸이 무엇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금육 때문에 쇠약해졌으니 강제로라도 고기를 먹이는 것은 결국에 파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배려 없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불화를 자초하는 길이다.

이번 추석에 서운했다면 다음 구정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다. 내가 줄 것을 생각하기 전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찾아보자. 다음 구정은 분명히 이번 추석과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smoon@gwang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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