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인물 평가에도 선입견이 있다. 백호 임제(林悌·1549~1587),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 35세 때 평안도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의 황진이 묘에 가서 술잔을 붓고 추도 시를 읊은 조선 최고의 풍류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임제는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수성지 愁城誌>, <화사 花史>, <서옥설 鼠獄說(재판받는 쥐 이야기)> 등 현실 비판적 소설을 여러 권 남겼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원생몽유록이다.

원생몽유록은 주인공 ‘원자허(元子虛)’가 꿈속에서 단종과 사육신(死六臣)을 만나 비분한 마음으로 흥망의 도를 토론하였다는 내용으로 임제가 28세 때인 1576년(선조 9년)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백호(白湖) 임제와 관원(灌園) 박계현(1524~1580)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 1575년에 임제는 속리산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주에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고향 나주에 내려와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을 만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제주시가 2011년에 발간한 <역해 영해창수록>(영월군수 박충원과 제주목사 조사수가 주고받은 시 모음집)의 부록 ‘관원백호창수록’에 나온다.

한편 박계현은 1576년에 판서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는데, 6월에 경연에서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면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선조는 즉시 <육신전>을 읽어보고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육신전>을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1일)

그런데 박계현의 아버지는 낙촌 박충원(1507~1581)으로 단종의 묘를 찾아낸 영월군수였다. 1456년 6월에 박팽년·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1441~1457)은 1457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당하고 10월 24일에 사약을 받았다.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워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이 동강에 흘러 다녔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었다.

중종 11년(1516년)에 노산군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25년간 찾지 못하였고 영월군수 3명이 이유도 모르게 죽었다. 이러자 영월에는 억울하게 죽은 단종 원혼이 작용했다는 해괴한 소문이 나돌았다.

1541년에 박충원은 영월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엄흥도의 후손을 통하여 무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는 묘소를 봉축(封築)하고 단장한 후에 제를 올렸다. 지금 영월군 장릉에는 박충원을 기리기 위하여 낙촌비각이 세워져 있다.

한편 생육신(生六臣) 남효온(1454~1492)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사육신의 충절을 기록했지만, ‘육신전’은 선조의 어명으로 금서(禁書)가 되었다. 세조의 후손 선조로서는 사육신은 역적이었다.

이러함에도 1576년에 임제는 ‘꿈속에서 노니는(夢遊)’ 환상적 수법의 소설을 써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정치권력의 모순을 폭로했다.

“원자허(생육신 원호를 말함)는 어느 가을밤에 꿈을 꾸었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장사(長沙)의 언덕에서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 등이 단종을 모시고 모여 앉아 강개시(慷慨詩)를 화답하는데 복건자(남효온을 말함)와 원자허도 비통한 어조로 시를 읊었다. 이때 무인 유응부가 뛰어들어, 썩은 선비들과는 대사(大事)를 도모할 수 없다고 탄식하며 검무(劍舞)와 함께 비가(悲歌)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다.”

임제는 몽환 소설로 단종과 사육신을 묘사하고 불의한 세태를 개탄했다. 금서가 된 <육신전> 대신 단종애사를 알림으로써 역사 기억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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