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과 안중근 의거

10월26일과 안중근 의거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10월 26일은 어떤 날인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이다. 1979년 이 날 박 대통령은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별세했다.

#2. 또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이다. 1909년에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처단했다.

그런데 상당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을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안 의사 얼굴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있다. 지난 5월 설현과 지민은 온스타일 ‘채널 AOA’ 역사 속 인물 맞히기 프로그램에서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라고 힌트를 주자 지민은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식 발음)?”이라고 되물었고, 설현은 스마트폰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검색한 뒤 정답인 ‘안중근 의사’를 겨우 맞췄다. 네티즌들은 어떻게 안중근 의사 얼굴도 몰라볼 수 있느냐는 지적이 쏟아졌고 설현과 지민은 사과했다.

또한 지난 8월15일 세종문회회관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감옥을 ‘뤼순’이 아닌 ‘하얼빈’으로 말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언론에 배포된 ‘경축사’ 관련부분)

경축사가 문제가 되자 청와대는 즉각 대통령 말씀 가운데 ‘하얼빈 감옥’은 ‘뤼순 감옥’이라고 정정했다.

#3. 그러면 안중근 의거를 자세히 살펴보자.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멈췄다. 곧바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랐다.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안중근은 탄환 7발을 장전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들고 총을 쏘았다. 제1탄은 이토의 가슴을 명중했고, 제2탄은 흉부를 맞췄다. 3탄도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런데 안중근은 쓰러진 자가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있는 가장 위엄 있게 보이는 사람에게 총을 쏘고, 그 옆 두 사람에게도 한 발씩 쏘았다. 이들은 가와카미 일본총영사, 모리 궁내부 비서관, 다나카 만철(滿鐵) 이사였다.

안중근은 저격 후 당황한 빛 없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어)를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고, 밤 8-9시경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 내 객실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15분 만에 죽었다.(일본 검찰조서의 기록)

10월 30일에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에게 첫 번째 심문을 받았다. 미조부치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당당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등 15가지 이유를 댔다.

11월 3일에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이감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의 공판은 1910년 2월7일부터 14일까지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단 6번으로 끝났다. 2월 14일에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일본 형법의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3월26일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나이 31세였다.

#4. 안중근 의거는 세계를 경악시켰다. 충격에 빠진 일본은 이 사건을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이라 칭하고 안중근을 흉한(兇漢:테러리스트)으로 몰았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손문과 양계초가 찬양시를 썼고, 훗날 중국 총리 주은래는 이 사건을 두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인민의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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