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하이힐

빨간색 하이힐

<문상화 광주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교정에 커다란 빨간색 하이힐이 설치되어 있다. 뒷굽이 성인남자보다 크고, 전체 길이가 웬만한 자동차보다 긴 이 하이힐은 원래는 광주시립미술관 앞에 있던 것인데 교정으로 옮겨졌다고 들었다. 멀리서 봐도 매끈하게 만들어진 빨간색 하이힐은 누가 봐도 신고 싶을 만큼 잘 만들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곡선이며 멋지게 흐른 뒷굽의 선이며,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저 하이힐 참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이 하이힐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어른 한 사람이 신발 안에 들어가 누워도 될 만큼 큰데다, 굽의 높이 또한 만만치 않다. 이 하이힐이 짝을 맞추어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면 ‘하이힐 한 켤레구나’ 할 텐데 덩그마니 한 짝이 서 있는 것이 정말 ‘현대미술스럽다.’ 그리고 대부분의 설치미술이 그렇듯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기보다는 하나의 정물처럼 굳어져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커다란 하이힐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 빨간색 하이힐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만약에 저 커다란 하이힐을 신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의 키는 도대체 얼마나 되어야 할까? 그녀가 자동차보다 커다란 발을 가졌다면 우리의 시선이 그녀의 종아리에서 허리를 지나 가슴과 어깨, 그리고 얼굴에 닿기 위해서 우리의 허리는 얼마만큼이나 뒤로 젖혀져야 할까? 활처럼 젖혀진 채 우리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 얼굴의 미추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아니면 그 여성의 덩치에 위압감을 느끼겠는가?

또 그 하이힐 여성은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보이겠는가? 우리가 생쥐를 우습게보듯 그녀 또한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겠는가? ‘내 신발 한 짝만한 크기도 안 되는 녀석들이 뭘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건지…’ 그녀는 아마 귀엽다는 듯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막이 오른 대선 레이스에서 각 후보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알리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아직 막 레이스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혼전양상을 띠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자들의 자리매김이 시작되고 앞서 나가려는 자와 뒤쫓는 자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을 부추키는 것에 언론이 단단히 한 몫을 한다. 근접거리에서 대선후보들을 관찰할 기회가 없는 유권자들에게 각 언론사가 주최하는 토론회는 후보자들을 평가할 중요한 기회이다. 따라서 그들이 벌이는 토론장은 유권자들에게는 그들을 평가할 의미 있는 자리이고, 후보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낼 중요한 자리이다.

엊그제 진행된 토론회에서 한 대선후보가 “정치는 흐르는 것이고, 정치는 국민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수준에서 언급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말은 대선후보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그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치는 상황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게 될 대통령은 국민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앞서서 이끌어야 한다. 감성에 이끌려, 혹은 표를 잃을까 두려워 이러 저리 휘둘린다면 그 사람은 대통령후보 자격이 없다.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느껴지지 않는 위험을 파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질 수 있다. 보이는 것에 따라 이러 저리 말을 바꾸고, 자신의 가치관 없이 주변에 이리저리 휘둘린다면, 그 사람은 입에 달고 다니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레이스를 접는 것이 좋다.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고, 그런 능력을 가졌을 때 유권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정에 덩그마니 놓인 빨간색 하이힐 한 쪽이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후보를 가지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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