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위젤과 ‘나이트’

엘리 위젤과 ‘나이트’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44년 봄부터 1945년 4월까지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그리고 부헨발트 수용소의 참상을 기록한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의 <나이트 La Nuit>는 귀중한 인류 자산이다.

위젤은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과 고뇌를 살아있는 문체로 표현하여 예술로 승화시켰고(새터데이 리뷰 서평), 책은 얇지만 깜짝 놀랄만한 책이었다.(뉴욕타임즈 서평)

1944년 봄 독일군이 루마니아 시게트의 마을을 점령했다. 게토가 설치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은 국경을 넘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5세의 소년 엘리 위젤의 가족도 가축 수송 열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곧바로 가스실에서 처형되었고, 위젤과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인 부나 모노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유대인 랍비의 후손이고 유대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한 엘리는 교수형에 처해진 두 남자와 한 소년을 목격하고는 ‘신은 과연 있는지?’ 의심하였다.

소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소년을 보아야만 했다. 내가 지나갈 때도 소년은 살아있었다. 혀는 아직도 붉었고, 눈도 여전히 감기지 않았다.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 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 날 저녁 수프는 시체 맛이 났다.(엘리 위젤 지음·김하락 옮김 나이트, 예담, 2007, p122-123)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기 이전에 엘리 위젤은 죽음의 행군을 하고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송된다. 위젤이 탄 열차 칸에는 100명이 타고 있었는데 12명만이 살아남았다.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의 아버지는 병사(病死)했다.

1945년 4월 11일 혼자 살아남은 위젤은 프랑스에 정착하여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48년에 ‘라 르슈’ 지(紙) 기자가 되었으며, 1958년에 자전적 소설 <나이트>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이 책은 30개국 이상의 언어로 출판되어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갖다 주었다. 특히 2006년에 그의 아내 메리언 위젤의 새 번역판이 출간되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한편 엘리 위젤은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아와 박해 현장을 찾아 구호활동을 벌이는 등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는 1978년 카터 대통령 직속 홀로코스트 위원회 의장에 임명됐고 1980년에는 홀로코스트 추모위원회 초대 위원장, 1986년에는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6년 12월10일 오슬로에서 한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위젤은 이렇게 말했다.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 어제 침묵한 사람은 내일도 침묵할 것이다. 증언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한 용기이다.

이어서 위젤은 말했다. “모든 대륙에서 인권이 침해받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보다 억압받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들이 처한 곤경을 어떻게 외면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도처에서 벌어지는 불의나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이번 부활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례를 깨고 하신 말씀과 상통한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내전과 테러 등 인류의 잘못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인류의 잘못이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길 바란다.

전쟁과 분쟁이 일어나 피부색, 민족이나 사회집단, 신앙 때문에 여성·어린이·이민자 등의 약자들이 매일 희생되고 있어 가슴 아프다.

곧 5월이다. 다시 <소년이 온다> 책을 꺼내 들었다. ‘5월 광주’의 아픔을 되새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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