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조세개혁(1)

세종의 조세개혁(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세기 초에 조세개혁 법안에 대하여 총 인구의 1/4에 달하는 17만 명에게 가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했다면 믿겠는가? 찬성률이 57%였는데도 법안을 백지화했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주민투표 이후 세법을 제정하기까지 15년이 걸렸고, 전면 시행에 45년이 걸렸다면 그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되묻지 않겠는가?

바로 조선 왕조 제4대 임금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 그랬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 사상을 몸소 실천한 세종대왕은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닮고 싶은 위인이다.

세종은 1428년(세종10년)부터 새로운 조세제도인 공법을 논의에 올렸고, 1430년에 토지 1결(結)에 쌀 10말(斗)을 받는 법안에 대하여 17만 명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문제점이 제기되어 법안을 백지화했다. 이후 전제상정소를 설치하여 법안을 다시 만들어 1444년에야 공법(전분6등·연분9등법)이 마련되었고, 1444년에 충청·전라·경상도 6개현에서 시범 실시한 이래, 1489년(성종 20년) 함경도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면 세종의 조세개혁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농업국가 조선의 세금은 주로 전세(田稅)였다. 당시의 조세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었는데 이 제도는 관리가 직접 농지를 방문해 세금을 매기는 방식으로 부정과 공정성 시비가 잇따랐다. 1427년 3월 16일 세종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문과 책문(策問)의 제(題)를 냈다. 요지는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전제(田制)로 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세법 개혁의 필요성을 밝히고 공법(貢法)을 시행함에 있어 폐단을 최소화 하는 방책을 논하라”였다.

1428년 1월 16일에 세종은 추수기에 풍흉을 3등으로 나누어 세를 징수하는 것을 논하였고, 1429년 11월 16일에는 세법을 조속히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연전에 공법(貢法)의 시행을 논의하고도 지금까지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인구가 점점 번식하고, 토지는 날로 줄어들어 의식이 넉넉하지 못하니, 가위 슬픈 일이다. 만일 이 법을 세우게 된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는 후하게 되고, 나라에서도 일이 간략하게 될 것이다.

또 답험(踏驗)할 때에 그 폐단이 막심할 것이니, 우선 이 법을 행하여 1,2년간 시험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령 토지 1결(結)에 쌀 15두(斗)를 받는다면 1년 수입이 얼마나 되며, 10두를 받는다면 얼마나 된다는 것을 호조로 하여금 계산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또 신민들로 하여금 아울러 그 가부를 논의해 올리도록 하라.” (세종실록 1429년 11월 16일)

1430년 3월 5일에 호조는 세종에게 공법에 의거하여 전답 1결마다 조(租) 10두를 거둘 것을 아뢰었다. 이에 세종은 “중앙정부 육조는 물론이고 각 관사와 도성안의 전·현직 관리, 각도의 감사·수령 및 관리부터 여염집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의 지시에 따라 호조는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4개월 후인 7월 5일에 중간보고를 했다. 호조판서 안순은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은 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험할 때에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하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험 폐해 시정방안 등을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숙의(熟議)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1430년 8월 10일에 호조는 토지 1결당 10말의 정액징수에 대한 전·현직 관리들과 17만 명 백성들의 가부 의견을 낱낱이 아뢰었다.(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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