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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9. 피와 땀으로 일궈낸 광양만의 기적, 광양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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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9. 피와 땀으로 일궈낸 광양만의 기적, 광양제철
광양만의 용광로가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내다

사진1 광양제철소 전경사진5(파노라마)
김이 생산되던 광양만 쇠섬 일대에 1983년 광양제철소가 세워졌다. 광양제철소는 포항제철소(포스코)와 함께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초일류기업이다. 광양만의 기적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이 한강의 기적은 한국을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제공
사진2.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전의 광양만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전의 광양만(삼봉산에서 바라본 광양만)

■망덕산(성덕산)과 광양제철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근처에는 망덕산(望德山)이 있다. 섬진강 하구 근처에 있으면서 남해 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망덕산의 옛 이름은 성덕산(聖德山)이다. 풍수지리가 사이에서는 국내 10대 혈(穴)이 있는 곳이라 알려져 있다. 임금을 낳을 군왕지지(君王之地)라 불리운다. 그래서 성덕산이라 했다.

광양은 예부터 큰 인물이 많이 나온 곳이다. 백운산 자락을 끼고 있는 옥룡(玉龍)이라는 지명도 큰 인물들이 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성덕산의 정기를 받아 이곳에서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던 성덕산과 관련된 참언(讖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광양땅 망덕산 아래 임금을 받들어 섭정하는 물형의 명당대지가 있으니 그 혈의 전면방위에는 임금과 신하가 마주보는 격인 안산과 조산이 다정히 혈을 감싸고 있다. 정혈을 잡아 쓰면 부귀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떨치게 되고 대성인이 배출돼 그 명성이 하늘에 닿은 인물이 될 것이며 부귀 또한 3천년에 달할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의 출현은 요원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왕 대신 왜구들이 나타났다. 고려 때부터 왜구들이 섬진강을 타고 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왜구들은 강을 타고 거슬러 하동과 구례까지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도 왜구들의 침범은 여전했다. 경상도 해안에서부터 분탕질을 치던 왜구들은 차츰 전라도 해안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광양 사람들은 왕이 태어난다는 성덕산에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며 행여 왜구가 쳐들어오나 살폈다. 그러다보니 성덕산은 언제부터인가 먼 곳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덕산이 돼버렸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망덕산이 품고 있는 예언을 잊어버렸다. 다만 망덕산을, 왜구가 쳐들어오나 가슴 졸이며 바다를 바라보는 산 정도로만 인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망덕산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저편에, 한국경제에서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철강업계에서도 왕좌(王座)를 누리고 있는 철강회사가 이미 등장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30년 전 망덕산 건너편에 들어선 포스코 광양제철소이다.
 

사진3. 망덕항에서 바라본 망덕산
망덕항에서 바라본 망덕산
사진4. 망덕항에서 바라본 광양제철
망덕항에서 바라본 광양제철
사진 5. 1962년에 촬영된 망덕포구
1962년에 촬영된 망덕포구(정병욱 생가)

그렇다면, 성덕산 자락의 혈이 왕을 태어나게 하는 곳이라는 참언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경제가 최우선의 가치인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용광로를 가지고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큰 기업이 망덕산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으니, 왕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라 조금 과장해도 될 성싶다.

더구나 광양제철은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태어난 기업이다. 박태준 회장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조국발전에 바친 분이다. 박 회장은 포스코 회장을 물러난 뒤 국무총리를 지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으니 성덕산의 기운과 박태준 회장의 능력이 맞물려 생긴 결과라 해도 될 성싶다.

이런 풍수예언은 포스코 포항제철도 마찬가지다. 조선숙종 관상감을 지냈던 이성지(李聖至)라는 인물은 풍수지리에 능했는데 지금의 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를 남겼다.

죽생어룡사(竹生魚龍沙)/가활만인지(可活萬人地)/서기동천래(西器東天來)/회망무사장(回望無沙場).

이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어룡사에 대나무가 자라면/ 만인이 능히 살만한 땅이 된다/서양의 물건이 동쪽으로 올 때/ 여기를 살펴보면 모래밭이 없어졌을 것이다’

오언절구에 등장하는 어룡사는 지금의 포항제철이 자리 잡고 있는 영일만 바닷가를 뜻한다. 대나무 굴뚝은 포항제철 제련소의 굴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포항제철에는 67개의 굴뚝이 있는데 이를 쭉쭉 뻗어있는 대나무로 여기면 이 오언절구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구문명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제련기술이 들어와 부자동네가 되고 산천이 변했으니 이 또한 맞는 내용이다.

하기야 광양제철이 들어선 섬의 이름이 쇠섬(金湖島)이었으니 지금의 자리에 광양제철이 세워진 것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광양제철 부지는 광양만에 있는 자그마한 섬 13개를 이어 바다를 메워 조성됐다. 바다는 13개 섬에서 나온 돌과 흙을 사용해 매립했다. 그런 다음 만들어진 큰 섬 바깥을 단단하게 돌로 쌓은 호안공사를 했다. 말 그대로 ‘돌로 쌓아 생긴 호’라는 뜻의 금호도가 된 것이다.

■광양제철 입지선정의 내력
 

사진6.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의 광양만 모습(위성사진)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의 광양만 모습(위성사진)
사진9. 금호도 원주민 김양식 김발작업모습 1982년3월25일 촬영
금호도 원주민 김양식 김발작업모습(1982년 3월 25일)
사진10. 광양제철이 들어서기전 바다모습
광양제철소 건설전의 광양만(삼봉산에서 바라본 광양만)

광양제철소는 포항제철소에 이어 국내에 세워진 두 번째 종합제철소이다.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1981년 11월에 광양만으로 입지가 확정된 후 33개월에 걸친 부지 조성 공사 끝에 1983년 10월 24일 개소했다. 1987년 4월에 준공된 광양제철소 1고로는 3차 개선공사를 거쳐 세계 600개의 용광로 중에서 가장 크다.

<중앙일보>편집국장과 서강대 부총장을 지낸 이장규 현 짐코(GIMCO)회장이 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책을 보면 당시 출범한 5공 정부가 어떤 이유로 광양을 제2제철소 부지로 확정했는지에 대한 배경설명이 나온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한 말이다. 김 전 수석은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숨진 인물로 소신껏 경제정책을 펼쳐 신임을 받았었다.

1970년대 말 정부는 제철소를 추가로 건설키로 하고 부지선정 작업을 벌였다. 당시 건설부는 평택과 광양 등 몇 군데를 부지후보지로 정하고 프랑스의 한 회사에 부지선정을 위한 용역을 맡겼다. 박태준 사장은 내심 광양을 제2제철소 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설부는 광양은 지반이 약하다며 평택을 고집했다.

그래서 다른 해외업체에 부지선정을 위한 용역을 맡겼는데 결과가 같았다. 건설부 측은 제2제철소를 평택으로 결정할 태세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지를 결정할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안전기획부가 부지선정과 관련된 보고 한건을 올렸다.

안기부의 보고내용은 건설부 공무원 상당수가 평택항 일대에 땅 투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포철직원들의 광양지역 땅 투기는 전혀 없었다고 보고했다. 건설부 고위공무원들은 이 같은 보고가 올라갔다는 소식에 모두들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고 한다. 이장규 편집국장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책에서 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제철소 입지 문제는 그걸 잘 아는 포철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합시다. 건설부 공무원들 손해가 많겠소.”

■철강신화의 주인공 박태준
 

사진 11. 박태준 회장 매립현장 시찰
박태준 회장 매립현장 시찰 모습(1983년 4월 2일)

포스코는 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뜨거운 열정과 뚝심, 그리고 조국애로 탄생한 기업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1927년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에서 자라났다.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이 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박정희와 박태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박정희 대위는 사관학교 2중대장이면서 탄도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박태준은 박정희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태준은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에게 맡겨진 화천수력발전소 방어임무를 완수하는 등 조국을 지켜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박태준의 능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그리고 청렴한 성격을 잘 아는 박정희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이 되자 그를 인사참모로 발탁했다. 5·16 혁명이 성공해 박정희가 국가재건회의 의장이되자 박태준은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태준은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미국유학을 가려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붙잡았다.

박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한·일국교 정상화 사전작업을 위한 일본 특사의 중책을 맡긴다. 일본특사로 활동하면서 박태준은 일본 정재계 실력자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된다. 이런 인적자원은 그가 나중에 농업분야에 사용할 대일청구권 자금을 제철소건설자금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일본을 설득하는데 큰 힘이 됐다.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했다. 박태준은 사내에 만연했던 횡령과 부정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현장에서 직원들을 독려하며 회사체질을 바꿔나갔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대한중석은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돌아섰다. 박정희는 이런 박태준의 열정과 능력, 청렴결백을 더욱 신뢰하게 됐다.

1965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박대통령의 ‘종합제철소 건설 지시’는 당시로서는 실행 불가능한 지시였다. 우선 기술이 없었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건설자금도 없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믿었다.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종합제철소는 제선(쇳물 만들기)과 제강(강철 만들기), 압연(금속가공), 열연(금속 성형) 등 전 과정을 모두 갖춘 설비를 갖추고 있는 철강공장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설비와 공정이 구비돼야 일관 종합제철소라고 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기술이 있다하더라도 자금이 없었다. 설령 철강이 생산되더라도 외국산 철강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박태준은 일관제철소 건설자금 마련을 위해 1967년 국제차관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국제개발은행(IBRD)이 부정적으로 나왔다. 한국은 종합제철소 건설능력이 없으며 설령 세운다 하더라도 부실운영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세계은행과 미국, 일본, 유럽 각국이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종합제철소 건설에 비협조적이었다.

돈을 끌어 쓸 곳이 없어지자 종합제철소 건설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이때 대일(對日)청구권자금 8천만 달러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지만 이 돈은 일본이 자금의 사용처를 미리 못박아둔 것이었다. 농업부문 사업에만 사용될 수 있었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제철소건설자금으로 쓰려면 한국정부 뿐만 아니라 일본을 설득해야 했다.

박태준 회장의 뚝심과 지혜, 지칠 줄 모르는 설득과 협상력이 이때 발휘됐다. 우선 정부부처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그 다음에는 일본 정부의 수뇌부를 만나 사정했다. 한국이 잘 살아야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솔깃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중국의 오래된 전략)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박태준의 설득에 일본 정부 고위인사들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철소 건설에는 외자 1억2천370만 달러가 필요했는데 대일 청구권 자금 6천370만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 차관 5천만 달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거기다 ‘신일본제철’기술자들을 보내 포항제철소 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박태준 회장의 집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수상을 지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당시 자신을 설득하던 박태준에 대해 “그는 한국의 진정한 애국자다. 냉철한 판단력과 부동의 신념, 정의감, 깊은 사고력을 겸비한 그의 인품이 일본의 대한(對韓) 협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극찬했다.

또 박태준이 세계은행에 차관을 신청했을 때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국제제철차관단의 J. 지퍼 박사는 1986년 박태준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내가 쓴 보고서는 정확했다. 다만 나는 한 가지 실수를 했을 뿐이다. 그때는 한국에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한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이다”

■제철보국(製鐵報國)과 ‘우향우(右向右) 정신’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다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이 착공됐다. 일본 기술자들은 제철소 준공이 최소 4년, 최대 5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들의 생각이었다. 박태준은 달랐다. 박태준은 공기를 앞당기기 위해 하루 24시간 작업을 지시했다. 그리고 본인도 3시간만 자고 현장으로 나갔다.

벼락치기 공사라고 해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박태준은 공사현장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공사가 이뤄지고 있으면 공사를 중단시키고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포항제철 제강공장 파일이 부실하게 박아 진 것을 발견한 박태준이 현장소장을 불러 지휘봉으로 안전모를 치며 “저것은 파일이 아니라 담배꽁초”라며 “혈세로 짓는 공장을 저렇게 허술하게 지어 쇳물이 엎질러지면 동료가 죽는다. 당신은 민족반역자”라고 호통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태준은 양질의 철강재를 생산해 어서 빨리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는 사원들에게 제철보국을 강조했다. 그는 1968년 4월 1일,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린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식에서 “포항종합제철의 모든 성공여부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사명이다”며 “좋은 철강재를 생산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1978년 3월 28일 직원들을 위한 연수원 특강에서는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해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제철보국을 이루지 못하면 모두 영일만 바다에 빠져죽는다는 각오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우향우 정신이다. 조상들이 흘린 피눈물의 대가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일관제철소를 제대로 건설하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인 만큼 제철소 부지에서 우향우 한 뒤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니 공사는 튼튼하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밖에 없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임직원들이 현장에서 고생한 덕분이었다. 마침내 포항제철소 공사는 착공 3년 3개월 만인 1973년 7월 2일 준공됐다. 일본인 기술자는 물론이고 미국 등 각 나라가 깜짝 놀랐다. 외국의 전문가들은 박태준이 없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고 혀를 내둘렀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이 일본을 방문했다. 기미츠제철소를 찾은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요시히로 회장은 등소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외국의 최고 경영자들이 박태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도 박태준에 대해 “박태준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복무하며 나라를 지켰고, 한국이 경제부흥을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는 기업인으로,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는 정치인으로 봉사하는 등 그의 삶은 봉사로 채워져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박태준과 광양제철, 그리고 국가경제발전
 

사진8. 광양제철소건설사무소 현판식과 고준식사장(좌측)
광양제철소건설사무소 현판식(1981년 11월13일)
사진12. 광양제철부지 동호안 준설현장 1983년9월2일
광양제철부지 동호안 준설현장(1983년 9월 2일)
사진13. 광양제철 1고로에 화입하는 박태준회장
광양제철 1고로에 화입하는 박태준회장(1987년 4월 24일)
사진14. 광양 1고로 건설 모습1986.9.10
광양 1고로 건설 모습(1986년 9월 10일)
사진16. 준설매립 착공식
광양제철소 부지 준설매립 착공식(1983년 2월 28일)
사진17. 제 2제철소 건설 광양 확정 주민 환영 축제 1981.11.12
제2제철소 건설 광양 확정 주민 환영 축제(1981년 11월 12일)

광양제철 공사는 난공사였다.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만든 부지에 제철공장을 짓는 일이었기에 지반을 단단하게 하고 어떤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게끔 둑을 잘 쌓는 것이 중요했다. 박태준은 작업자들이 튼튼하게 파일을 박고 그 파일들을 볼트로 잘 잇는지를 수시로 살폈다. 조금이라도 부실한 점이 눈에 띄면 공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사소한 부주의와 조그마한 부실공사는 대형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박득표 전 포스코 사장은 이와 관련해 “우리 임원들이 어떤 현장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회장님은 희한하게도 딱 집어내듯이 찾아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1983년 광양제철 호안공사 때는 파일과 석축이 제대로 박히고 쌓여져 있는지를 임원들이 직접 확인했는지를 묻곤 했다. 일부 임원들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잠수복 가져와. 내가 들어가지”라며 차가운 겨울바다에 뛰어들 기세였다. 임직원들은 감사팀 직원들이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바닷속에서 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토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포스코 광양제철이 완성됐다. 1987년 4월 25일 오전 9시, 광양만에 지은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광양제철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내용적 6천㎥인 1고로를 비롯 모두 5개의 용광로가 있다. 지난해까지 광양제철 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은 모두 4억 2천만 톤이다. 이는 중소형자동차로 4억 2천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광양제철소는 품질 좋고 가격이 저렴한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한국기업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높였다. 광양·포항제철이 없었더라면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조선, 건설, 전자 등의 발전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특히 광양제철소는 자동차강판 생산을 위한 기술력과 품질 경쟁력 확보에 집중해 포드와 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상위 15개사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광양제철소의 발전은 지역의 비약적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 양식을 주로 하던 광양만이 제철소와 50여개의 철강 연관기업들이 상생 발전하는 세계적인 철강지역이 된 것이다. 또 철강제품 수출입을 위한 광양 항만과 철도,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확충되면서 광양시와 광양항이 동북아 권역의 물류 허브로 발돋움하고 있다. 광양제철소는 주민들의 복리증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각종 지원 사업을 통해 광양 주민들과 함께 행복한 광양을 만들어가고 있다.

■포스코의 도약
 

사진 7. 광양제철소 출입문
광양제철소 출입문

포스코는 세계 제일의 철강사업 수익력을 지속하고 고유기술과 차별화된 역량을 기반으로 미래성장 사업을 육성한다는 계획을 담은 신(新)중기전략을 수립, 권오준 회장을 중심으로 이를 실천해가고 있다. 신중기전략은 고유기술 기반의 철강사업 고도화, 비철강사업의 수익성 향상, 차별화 역량 기반의 미래성장 추진, 그룹 스마트화 등이 핵심내용이다.

이에 따라 신중기전략이 완료되는 2019년 말에는 연결 영업이익이 5조 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16년의 연결 영업이익은 2조 8천억 원 수준이었다. 포스코 측은 신중기전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미래성장 분야의 매출액도 2025년까지 11조 2천억 원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2017년 3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NH투자증권 대강당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포럼에서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확산, 글로벌 철강산업 경쟁 심화,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영전략이 필요하다며 2017년부터 2019년까지의 경영혁신을 내용으로 하는 신중기전략을 발표했었다.

포스코는 이 같은 신중기전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포스코를 미래형 초우량 사업구조로 바꿔나갈 계획이다. 철강에서 비철강으로, 제조에서 서비스로, 전통에서 미래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미래형 사업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또한 활동무대를 더욱 넓혀 진정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구상이다.

포스코의 발전은 광양제철소의 발전이다. 광양제철소의 발전은 곧 광양을 중심으로 한 남해일대 지역의 발전을 뜻한다. 더 나아가 한국경제와 한국사회의 발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와 박태준 전 명예회장의 제철보국 정신은 영일·광양만의 허허벌판과 바다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세워지게 했다. 그리고 이 제철소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기틀이 됐다.

광양만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이 증명된 곳이다. 공장을 세울 곳이 없어 바다를 메꾸고, 공장을 세울 돈이 없어 허리를 굽히며 사정을 하고, 공장을 운영할 기술이 없어 일본 기술자들을 불러 어깨너머로 공부를 했지만,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그래서 지금의 포스코는 세계인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초일류기업으로 우뚝 섰다. 포스코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업이자, 또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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