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 강산을 저 왜적들이 밟도록 놔둘 수 있겠느냐”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7. 무안 의병장 김충수 선생과 몽탄 사창마을
“어찌 이 강산을 저 왜적들이 밟도록 놔둘 수 있겠느냐”
몽탄 영산강 변 등에 흩뿌려진 호남의병의 절규와 恨
정유재란 당시 대굴포 전투에서 김충수 의병장 부부 순절
무안 1천여 의병도 몰살… 무안·함평 호남의병사 부각돼야
 

무안 몽탄 사창마을의 비림과 우명산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마을 우산사(牛山祠) 입구 도로변에는 비석 일곱 기가 서 있다. 사람들은 비석이 많다고 해서 이곳을 비림(碑林)이라 부른다. 사창마을 뒤쪽에 있는 산은 소가 영산강 쪽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우명산(牛鳴山)이라 한다. 사원이름을 우산사라 한 것은 마을 형태와 산세가 소가 앉아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무술년 정월에 영산강변에 섰다. 무안 몽탄의 영산강 변을 찾은 그날, 천지에는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전남대 김재기 교수의 안내로 발목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며 영산강변을 오갔다. 영산의 물들은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물결 위로는 시린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영산강.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저 물을 따라 흘러갔을까? 또 얼마나 처절했던 역사의 질곡들이 영산강 주변에 펼쳐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안과 함평, 그리고 나주로 이어지는 영산강의 물길을 따라 육로를 거슬러 올랐다. 무안 몽탄과 함평 곳곳에는 임진·정유년에 왜적에 맞서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숨져간 김충수(金忠秀)의병장과 가문 사람들의 자취가 남겨져 있다. 영산강 물결에서는 김충수 의병장과 함께 의롭고 용맹스럽게 죽음을 함께 한 정부인(貞夫人) 나씨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사창마을 비림앞에 서 있는 김재기교수
사창마을 나주 김씨 비림에는 을묘왜변 때 공을 세워 광주목사로 제수된 취암(鷲岩) 김적(金適)선생과 아들 귀암(龜巖) 김충수(金忠秀)선생, 진주대첩에서 순절한 조카 김예수(金禮秀)선생 등의 비가 있다.

어디 그뿐이랴, 김충수 의병장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던 1천여 명 의병들이 적을 맞아 싸우면서 내지르던 함성이 곳곳마다 스며있었다. 2018년 정월의 영산강은 무심한 듯 흐른다. 평화롭다. 그러나 1597년 영산강은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땅을 지켜내려다 숨져간 조상들의 피가 강물을 이뤘고, 그 주검이 산을 덮었다.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원통함이 계곡을 메웠다.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적들은 전라도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몰살시키려다 오히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했다. 왜적들은 명량해전 참패 분풀이를 전라도 해안지역 조선백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다. 진도·해남지역에 상륙해 조선의 백성들을 무차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했다. 코를 베어 전공(戰功)으로 삼고 여자들은 겁간한 뒤 죽이거나 끌고 갔다.

왜적들은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암·무안·함평·남평 일대를 노략질했다. 왜적들이 들어와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고 있었던 김충수 선생은 왜적들을 물리치는데 한 몸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향민(鄕民) 1천여 명을 모았다.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호미와 낫을 들고 의병이 됐다. 김충수 선생 역시 무인이 아니었지만 칼을 차고 의병들을 지휘했다.
 

김충수의병장 순절장소 기념비

김충수 의병장은 왜적의 전선이 영산강 하류인 몽탄강(夢灘江)하류 쪽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충수 의병장은 가족들을 대곡산(大曲山)에 머물게 한 뒤 상류에서 배를 몰고 가 왜적들과 싸웠다. 오랫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수도 많고 싸움에 능한 왜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대곡산으로 후퇴해 싸웠으나 결국 김충수 의병장과 아내는 그곳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1천여 명의 의병들 역시 모두 그곳에서 살육을 당하거나 왜적들에게 포로가 됐다.

정유재란 당시 몽탄강 유역은 목포에서 무안, 함평, 나주, 광주로 진입하려는 왜적과 이를 저지하려는 호남의병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왜적들에 맞서 김충수와 김덕수 형제, 최오, 정기수, 송박, 박종룡이 의병을 일으켜 조선과 이 땅의 백성들을 지키려 했다. 몽탄강 유역은 호남의병사(湖南義兵史)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무안지역 의병활동

그러나 김충수 의병장이 왜적을 맞아 벌인 몽탄강 대굴포 전투와 박제(朴悌)와 그의 처조카 송박(宋珀)등이 중심이 돼 치른 무안읍 매곡리 보평산 전투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몽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사에 대한 조명과 유적지 보존이 절실하다. 특히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김충수 의병장 일가의 충혼과 기개를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김충수 의병장 일가의 충혼
 

김충수의병장, 나씨부인 정렬비
비림 가장 오른쪽에 있는 비가 김충수 의병장 부부의 충절을 기리는 비다. 비석 전면에는 ‘구암 김충수 정부인 금성 나씨 정렬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 뒤쪽에 금성나씨 열부각이 있다.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마을 우산사(牛山祠) 입구 도로변에는 비석 일곱 기가 서 있다. 사람들은 비석이 많다고 해서 이곳을 비림(碑林)이라 부른다. 비림 중앙에 김충수의 아버지 취암(鷲岩) 김적(金適)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비가 김충수 의병장 부부의 충절을 기리는 비다. 비석 전면에는 ‘구암 김충수 정부인 금성 나씨 정렬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 뒤쪽에 금성나씨 열부각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은 ‘충의사 김예수 순절비’다.

- 취암(鷲岩) 김적(金適)

취암 김적(1507∼1579)은 나주 김씨(羅州金氏)의 22세손(世孫)이다. 1507년 무안현 대사동에서 태어났다. 1537년 진사가 된 후 1543년 중종 38년 식년 문과에 합격, 명종 10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왜병을 물리친 공로로 광주목사에 제수됐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예조판서에 추증됐다. 을묘왜변은 1555년 5월 11일 왜구 6천여 명이 70여척의 배에 나눠 타고 와 해남의 달량진(達梁津:지금의 북평면 남창)과 진포(梨津浦:북평면 이진)에 상륙해 노략질 한 사건이다.

1582년 호남유림들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취암서원을 세웠다. 취암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충수(忠秀), 효수(孝秀), 덕수(德秀), 재수(載秀), 진수(振秀)다. 취암의 동생 원 역시 5남을 두었는데 그들은 인수(仁秀), 의수(義秀), 예수(禮秀), 지수(智秀), 신수(信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최경회 장군이 김원의 사위다. 취암으로 보면 최경회 장군이 조카사위다.

- 귀암(龜巖) 김충수(金忠秀)
 

정유재란격전순절유지
함평군은 지난 2016년 6월 21일에 김충수 의병장이 순절한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함평군 학교면에서 나주시 동강면으로 건너가는 동강교 못미처 도로변에 있다.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김충수(1538∼1597년)의 자는 중심(中心)이고 호는 귀암(龜巖)이다.

21세 때인 1558년(명종 13)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一等)으로 녹훈(錄勳)됐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除授)됐다.
 

선무원종공신녹권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군량과 군마(軍馬)를 동원해 관군을 도왔다. 향민 1천여 명을 규합, 한양을 지키고 임금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 왜적의 전선이 몽탄(夢灘)에 정박해 있는 것을 탐지하고, 왜적들을 공격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싸움에 졌다.

왜적들이 항복하기를 강요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참살 당했다. 이 과정에서 아내인 나씨 부인이 적의 칼로부터 남편을 구하기 위해 막아서다가 그녀 또한 죽임을 당했다.

조선조정에서는 나씨 부인의 기개를 높이 사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했다. 우산사(牛山祠) 입구에 김충수의 부인 금성 나씨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다.

- 김덕수(金德秀)

김덕수는 정유재란 초기에 형 김충수가 군량미 200석과 군마 300필을 모아 관군을 도울 때 함께 활동했다. 김덕수(金德秀)는 형 김충수가 대굴포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자 이후 의병활동을 하며 왜적과 싸웠다. 고하도에서 주둔하고 있는 이순신 수군이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에 군량미 150석을 보내는 등 조선수군의 전력향상에 도움을 주었다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전한다. 정유재란 이후 3등 공신에 책봉됐다.

- 김예수(金禮秀)

김예수는 김충수 의병장의 사촌동생이다. 김예수의 자형(姉兄)은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장군이다. 김예수는 임진왜란 당시 최경회 장군이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자신이 일으킨 의병들을 데리고 최경회 장군의 군사에 합류했다. 김예수는 최경회 장군과 함께 전주(全州), 남원(南原) 일대 왜적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후 1593년(선조 26) 6월에 왜적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자 그는 최경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분전 고투했다. 그러나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몸을 더럽히게 할 수 없다”며 최경회 장군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했다.

대굴포 전투

김충수 의병장이 왜적을 상대로 싸운 곳은 지금의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산 172-6번지 일대이다. 이곳은 지금은 23번 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마치 예전부터 들판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나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까지는 몽탄강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몽탄강은 대곡산 자락과 인접해 있다. 수백 년 전 산자락에서 강으로까지 이어지는 곳에는 대밭과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평군은 지난 2016년 6월 21일에 김충수 의병장이 순절한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함평군 학교면에서 나주시 동강면으로 건너가는 동강교 못미처 도로변에 있다. 함평기아챌린저스필드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 쪽이다. 기념비에는 대굴포 전투와 김충수의병장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귀암 김충수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격전을 치르다가 가족과 함께 순절한 곳이다. 김충수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량미 200석과 군마 300필을 헌납하여 관군을 구제했고 군병을 모집해 근왕(勤王)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가동과 향촌 장정 1천여 명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우려고 가다가 몽탄강(夢灘江)을 거슬러 올라오는 대규모 왜군을 맞아 분전하여 많은 적을 물리쳤으나 끝내 패퇴하여 학교면 곡창리 대곡산(大曲山)에서 순절하였다.

이때 부인 금성나씨는 남편이 왜적에게 둘러싸여 사경에 처하자 그 앞을 가로막고 왜적을 꾸짖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중략)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충의정신을 기려 격전지이자 순절한 옛 터에 이 표지를 세운다’

강경호 작가는 그의 저서 <역사와 생명의 고을 무안>에서 김충수 의병장과 나씨부인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조금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왜구의 재침인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김충수는 집안의 심부름하는 사람과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의 뜻있는 장사(壯士) 천여 명을 규합하여 관군을 돕고자 길을 떠나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적의 배가 출현하니 가족을 몽탄의 대곡산에 은신케 하고 병졸들을 사포나루에 모이도록 해 준비된 배에 올라 적을 맞아 교전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적의 배가 많은 군사와 함께 강을 덮어버리니 수가 적은 아군은 부득이 후퇴하여 대곡산에 진을 치니 적병이 곧 뒤를 따라와 목에다 칼을 대고 항복하도록 위협하였다. 그러나 김충수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조복(朝服:벼슬아치들이 입는 옷)을 내보이며 나는 이 나라의 신하로서 어찌 너희들에게 항복할 수 있겠느냐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적은 좌우로 서서 몽둥이와 칼등으로 공의 온몸을 후려치므로 몸뚱이는 온전한 살 한점이 남지 않았으나 오히려 큰 소리로 적의 무도함을 꾸짖다가 끝내 적의 칼에 죽었다.

이 광경을 보던 부인 나씨가 남편을 가로막고 적에게 고함을 치니 나씨 부인마저도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버리고 울부짖던 두 아들 천성(天成)과 만성(晩成)을 생포하여 끌고 가니 생사를 알 수 없어 뒤가 끊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처참한 형상을 몰래 숨어보던 김충수의 가노(家奴)가 숨을 벌떡이며 김충수의 동생 덕수에게 이 사건을 전하여 덕수가 형의 시신과 형수 나씨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했다. 오늘날도 이 대곡산을 지나는 사람들은 김참판 부부가 순절한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나씨부인은 대사헌 나송제(大司憲 羅松薺)의 손녀로 보통여성과 다른 부덕을 쌓은 여자로서 지아비를 따라 나라에 목숨을 바치니 정열부인으로 포상하여 오늘의 몽탄면 사창리에 열녀각을 세웠고 김충수는 우산사에 모셔 유림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이 근방에서는 사실 김충수의 애국단충은 고재봉이나 김건제에게 뒤지지 않으나 벽지에서 태어나 일찍 그 이름이 들춰나지 못했고 또 위 두 분의 전사지가 금산과 진주로 만인이 보는 앞이었으므로 하루 동안에 그 소문이 전국에 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김충수의 전사지는 심산유곡이어서 그때 가담했던 지방의병 밖에 모르므로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이 누락되었으나 지방 선비의 여러 차례의 천거로 공의 충정과 부인의 열행이 상달케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방손들이 제사를 받들어오다가 김충수의 11대 손 응구와 명구가 김충수가 죽은 지 308년 만에 나타나니 그가 끼친 유덕이 뒤늦게야 빛을 보게 된 것이라 한다’

옛 기록과 후세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종합해볼 때 김충수 의병장은 대굴포(사포나루)에서 일단 수전(水戰)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선의 수가 많고 왜적의 지원군이 몰려들자 배에서 내려 대곡산으로 후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충수 의병장은 생포당한 뒤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왜적들의 무도함을 꾸짖다가 결국 참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라도 수영터였던 대굴포
 

대굴포앞 순절옛터 안내
대굴포는 과거 전라도 수군 수영(水營)터다. 대굴포 인근에는 ‘귀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안내판은 지난 2013년 10월 29일에 세워졌다. 안내판 너머로 영산강이 보인다. 영산강 하구언이 건설되면서 물길이 좁아졌으나 옛적에는 큰 전선들이 오갔던 넓은 강이었다.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 입구에 있는 대굴포는 전라도 수군의 최고 지휘부가 있었던 수영(水營)터이다. 본래 수영은 전라북도 옥구에 있었다. 그런데 1408년(태종8년) 12월 전라도 수군 절제사의 요청에 따라 전라도 수군 본부를 대굴포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전라도 수군본부는 1432년(세종 14년) 목포로 이전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대굴포에 있으면서 서남해안 일대의 방어를 담당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굴포 수영에 전선 24척(대선 8척, 중선 16척)이 있었으며 수군 1천895명이 배치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대곡마을 일대에는 이곳이 과거 큰 수군진영이었음을 알려주는 지명들이 남아있다. 영산강 물줄기가 막힘에 따라 대굴포 앞 강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기에 지금의 대곡마을 입구의 모습에서 2천여 명에 가까운 수군이 주둔했던 수군본부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포구를 어림잡아 짐작해 보는 것은 대체로 쉽다.

대굴포는 영산강 넓은 물로 전선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포구였다. 또 많은 전선을 접안시킬 수 있었으며 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었기에 수군진영으로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대곡마을 입구 건너편의 논밭들은 과거 전선들의 정박지였다. 영산강 하구언 건설로 물길이 끊어지고 강폭이 줄어들면서 포구가 논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대곡마을 주변의 지명은 과거 이곳이 수군본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마을 앞 도랑에 있는 평평한 바위는 ‘수통막’(배들의 통제소), 망월동 앞의 얕은 산은 ‘동막’(동쪽의 초소), 동막에서 남쪽기슭에 자리한 언덕은 ‘빈정’(외부 손님을 맞는 장소), 등량골 암벽이 있는 곳은 ‘양창’ ‘창등’(군량미창고), 마을 앞뜰은 ‘집결배미’, 마을 뒤 언덕은 ‘군사등’으로 불리고 있다.

김충수 의병장은 이 대굴포에서 의병들과 함께 배를 몰고나가 적선과 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대굴포 인근에는 ‘귀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안내판은 지난 2013년 10월 29일에 세워졌다. 함평군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의병장 김충수 선생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도로변에 ‘김충수의병장순절기념비’를 다시 세운 것이다.

사실 김충수 의병장이 참살당한 곳은 강변이 아니라 대곡산 중턱이다. 수년 전만 하여도 대곡산 중턱에는 김충수 의병장과 아내인 금성 나씨가 죽임을 당한 장소와 유래를 알리는 표적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숲이 무성해지고 사람이 왕래가 적어지면서 표적지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사창(社倉)마을과 우산사(牛山祠)
 

우산사
우산사가 있는 사창마을의 입향조는 나주김씨 김적이다. 나주 김씨 집성촌인 사창마을은 예부터 큰 인물들이 배출됐다. 마을의 주산인 우명산이 풍수적으로 귀한 곳이어서 큰 인물들을 배출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산사는 1683년(숙종 9) 나주김씨 문중에서 원래 취암사(鷲岩祠)로 창건했다. 창건 당시 취암 김적(1507~1579)을 배향해오다가 1828(순조 28)년에 귀암(龜岩) 김충수(金忠秀)(1538~1597)와 지암(支岩) 김약화(金躍華)를 추가로 모시게 됐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1882년(고종 19)에 다시 세워졌다. 1945년에 사우를 중건하면서 월당 김대경(金臺卿)을 주향으로 모셨고 그 후 김원, 김덕수, 김예수, 김지수 등이 추배됐다.

우산사가 있는 사창(社倉)마을의 입향조는 나주김씨 김적이다. 김적 선생은 아버지 김수남(金粹南)과 함께 무안읍 성동리 대사동에 살았으나 1560년 사창에 정착했다. 사창은 이후 400여 호가 있는 큰 마을로 번창했다. 조선 중종 때 곡물을 저장해 춘궁기나 가뭄 때 대여했던 사창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이 ‘사창’이 됐다고 전한다.

사창마을은 영산강을 앞에 두고 뒤쪽으로는 너른 들이 있어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알려졌다. 여러 기의 지석묘가 사동-우산사-몽탄북초등학교-사창삼거리-용뫼-차뫼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1984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우명산 동쪽에서 2기의 고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사창마을 뒤쪽에 있는 산은 소가 영산강 쪽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우명산(牛鳴山)이라 한다. 사창 삼거리 쪽으로 뻗어있는 맥이 소의 꼬리부분이라 한다. 옥반동 쪽의 산세는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사원이름을 우산사라 한 것은 마을 형태와 산세가 소가 앉아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창마을은 돌과도 관련이 많다. 우산사 뒷산 우명산 정상에는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취암(鷲岩)이라 불렀다. 김충수 의병장의 아버지 김적선생은 마을 뒷산 바위 이름을 따와 호를 취암이라 했다. 아마도 독수리처럼 용맹하고 바위처럼 강인한 인물이 되고픈 마음에 그리 지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충수 의병장의 호인 귀암 역시 거북이처럼 생긴 집 담장의 바위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충수 의병장은 이 거북바위 이름을 호로 삼았다.
 

우산사 앞의 거북이바위(귀암)

우산사 사당 뜰에는 김충수 순충비와 김적 선생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하마터면 없어질 뻔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이 이 비석을 부수려 했으나 그 계획을 들은 가문 사람들이 야밤에 땅을 파고 비석들을 숨긴 탓에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나주 김씨 문중 사람들은 광복이 되자 이 비들을 땅에서 파내 다시 세웠다.

나주 김씨 집성촌인 사창마을은 예부터 큰 인물들이 배출됐다. 마을의 주산인 우명산이 풍수적으로 귀한 곳이어서 큰 인물들을 배출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 마을에서만 4명의 국회의원이 배출됐다. 미군정 시절 대법원장을 지낸 추강(秋江) 김용무(金用茂:2대)선생과 동생 김용현(金用鉉:1-2대), 김옥형(金玉衡:5대), 12대 대통령 후보였던 김의택(金義澤:3,4,5,8대) 국회의원이다. 국내 최대 약품도매업 백제약품과 초당대 설립자 김기운(金基運)선생, 한성대 설립자 김의형(金義衡) 선생도 나주 김씨 후손이다. 이외에도 법조계와 학계 등에 수많은 인재들이 나주 김씨 문중에서 나와 나라를 부강케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김충수 처 금성나씨 정려(金忠秀 妻 錦城羅氏 旌閭)가 충남 탄천에 있는 이유

1799년 정조는 김충수를 의정부좌참찬·의금부지사·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했다. 남편과 함께 순절한 금성 나씨의 장한 뜻을 기려 정려를 내렸다. 금성 나씨의 정려는 나주김씨의 세거지인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 후손들이 거주하는 충남 공주시 탄천면 대학리에 다시 정려를 세웠다.

지금의 정려는 1983년에 중수한 것이다. 정려 안에는 ‘열녀증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행가선대부호조참판라주김공충수처정부인금성나씨지려(烈女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行嘉善大夫戶曹參判羅州金公忠秀妻貞夫人錦城羅氏之閭)’라고 쓰인 정려비와 1914년 이칙이 지은 정려기(旌閭記)가 걸려 있다.

김충수 의병장의 두 아들 천성(나주 김씨 24世)과 만성은 왜적에게 끌려가다 직산전투에서 패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공주 부근에 정착하였다. 그 뒤 장남 김천성은 공주 견산촌의 전주 최씨와 결혼해 탄천면에 정착했다. 만성 역시 충남 보령과 홍성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나주 김씨 문중은 김충수 의병장 두 아들의 생사여부를 몰라 김충수 의병장의 대가 끊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족보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충청도 공주와 보령 일대에서 나주 김씨 중 상당수가 천성과 만성의 후손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천성의 후손 중 일부는 평양과 평북 박천(博川), 영변(寧邊) 등지로 옮겨갔으나 대부분은 공주 탄천에 살았다. 김충수 의병장의 동생인 김재수는 조선 중엽 제주로 입도하여 취암공계가 번창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나주 김씨 취암공의 후손 집성촌은 전남 무안과 함평, 나주 일원과 충남 공주와 보령, 홍성, 제주 등이다.

면과정(棉瓜亭)
 

면과정

면과정은 몽탄면 다산리(茶山里) 차뫼(다산2리)마을 뒷산 길에 있는 재실이다. 고종 9년인 1871년에 지어진 정자이나, 나주 김씨들이 2011년에 중건해 김충수 의병장의 조부인 김수남 선생과 아버지 김적 선생 등 7대 8위(대경, 가구, 우운, 철하, 수남, 적, 충수, 덕수)를 모시는 제실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뒷산인 옥녀봉(玉女峯)에 다초(茶草)가 번성해서 마을이름을 다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면과정 묘표

나주 김씨의 조상묘가 있는 곳이 비선제이다. 주민들 사이에 비선제는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선제에는 옥황상제와 옥녀가 등장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옥녀봉의 옥녀가 몸을 정갈하게 하고 옥황상제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해 머리를 빗다가 실수로 비녀를 떨어뜨렸는데 그 비녀가 떨어진 곳이 바로 비선제라는 것이다.
 

비선제

 

 

 

 

 

 

도움말 = 김재기 전남대 교수, 백창석 무안 문화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정만진 역사진흥원초대이사장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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