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의 해’에

‘다산(茶山)의 해’에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정약용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는 2018년을 ‘정약용의 해’로 선포했다.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도 2018년을 ‘다산(茶山)의 해’로 정하여 공렴(公廉)을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1800년 6월에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1762∼1836)은 남양주 생가에 내려가 근신했다. 그런데 10살에 즉위한 순조(1790∼1834)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천주교 박해였다. 정약용 일가는 화를 입었다. 매형 이승훈과 셋째형 정약종은 참수당하고, 정약용은 경상도 포항시 장기현, 둘째 형 정약전은 전라도 완도 신지도로 유배 갔다.

그런데 9월 29일에 북경의 프랑스 신부에게 프랑스 함대 파병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졌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또 끌려갔다. 혐의 없음이 밝혀졌지만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갔다.

1801년 11월 24일 정약용은 강진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처를 줄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주었다. 1805년 겨울에 정약용은 보은산방에서 기거하였고, 1806년 가을에는 이청의 집에서 지냈다.

정약용은 1808년 봄에 윤단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와서 1818년 8월 유배가 풀릴 때 까지 11년간 살았다. 이 때 정약용은 다산(茶山)이란 호를 갖게 되었다. 다산은 초당 위 만덕산(412m)의 별칭이다.

한편 정약용은 1803년 가을에 남자의 성기가 잘림을 슬퍼하는 ‘애절양(哀絶陽)’ 시를 지었다. 관아는 낳은 지 사흘 밖에 안 된 갓난아이에게 군포세를 매겼고, 아전은 소를 빼앗아 갔다. 이 일을 당한 농민은 자기 양경을 자르면서 “이 물건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절규했다.

이 시기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 정약전(1758∼1816)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약용은 “조선은 썩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게 지금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1809년과 1810년엔 2년 내내 전라도에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였다. 이런데도 탐관오리들은 탐학만 일삼았다. 다산은 흉년인데도 가렴 주구하는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 ·<파지리>·<해남리> 3리(三吏) 시를 지었다. 마치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가 <신안리>·<석호리> ·<동관리> 3리 시를 지었듯이.

1810년 여름에 다산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을 지었다. 그는 마을과 골짜기에 득실거리는 파리들을 굶주려 죽은 자의 변신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천재(天災)보다 인재(人災)가 더 무섭고, 탐관오리의 학정(虐政)이 재난보다 더 가혹하다고 여겼다.

다산은 1808년부터 1817년까지 10년 동안 개혁관련 책 <방례초본>을 썼다. 여기에는 중앙의 관제, 세제, 각종 행정기구 등 일체의 제도와 법규에 대하여 개혁의 대강을 제시한 후 기존제도의 모순, 실제의 사례, 개혁의 필요성 등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마무리 할 무렵에 갑자기 회의(懷疑)가 왔다. “이 책을 누가 볼 것인가. 누가 경세를 펼칠 것인가? 정권을 잡고 있는 노론이 이 책을 보고 개혁을 할까?” 극도의 회의 속에 남인인 다산은 책 이름을 <경세유표(經世遺表)> 즉 ‘세상 경영을 유언으로 올리는 건의서’로 바꾸고 글쓰기를 중단했다.

그 대신 다산은 “한 사람의 선량한 목민관이라도 자기 고을을 조금이라도 잘 다스린다면 백성들의 시름이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는 생각에서 1818년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했다.

1821년 남양주 생가에서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목민심서>의 탄생은 다산의 전라도 강진에서의 18년간의 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전라도와 강진군은 <목민심서> 탄생 200년에 너무나 조용하다. 이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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