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이중 선생과 변씨 문중이 제작한 화차 가공할 위력 발휘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30.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변이중 화차와 호남의병
변이중 선생과 변씨 문중이 제작한 화차 가공할 위력 발휘
일본군 침입 대비해 미리 제작한 설계도 따라 300량 만들어
이중 40량 권율장군에게 보내 행주산성 야산 최전방에 배치
조선군사·의병들 조총 든 3만 일본군 7차례 파상공격 물리쳐
‘아녀자 돌 날라 투석전 승리’ 왜곡에 ‘호남의병 분전’ 가려져
바다에는 거북선, 육지에는 변이중화차…임란 극복한 신병기
육군60사단 포병연대는 변이중포병연대로 부대이름 바꾸기도
변이중화차에 대한 정당한 역사평가와 제작지 보존 필요성 커
 

변온섭 이사장이 변이중 화차를 설명하고 있다. 변이중 화차는 2량이 복원됐다. 하나는 봉암서원 앞 전시실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상무대에 전시돼 있다. 변이중 화차는 정면에만 14개의 승자총통아 장착돼 있다. 화약심지로 연결돼 3초 간격으로 발사된다. 승자총통 한 개에서 발사된 탄환은 15알로 실험결과 40초 동안 210여 알의 탄환이 발사됐다. 화차 내부는 두터운 나무로 막아 일본군의 조총사격으로부터 총통수를 보호하도록 설계됐다. 당시로서는 가공할만한 위력과 보호능력을 갖춘 신병기다. 행주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더 나아가 조선을 구하는데 기여한 바가 컸다.

 

 

흔히들 행주대첩을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관민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라 알고 있다.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을 권율장군과 부녀자들로 알고 있는 이가 상당히 많다. 전투가 조선관군에게 불리해지자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이 돌로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여 마침내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내용을 역사교과서에서 배웠고 지금도 포털사이트에는 이런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검색창에 ‘행주대첩’을 써넣으면 각 ‘백과사전’에 관련 내용이 뜬다. 다음백과에 소개돼 있는 행주대첩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행주대첩(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1593년 2월 12일 하루 동안 행주산성에서 벌어진 대첩.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불린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끌었고, 이 전투로 일본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만들어 입고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고 한다’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청아출판사)에는 행주대첩이 이렇게 정리돼 있다.

‘1593년 2월 12일, 왜군 3만여 명이 한양 서쪽의 행주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부대를 세 무리로 나눠 파상공세를 펼쳤다. 성 안에서는 권율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결사 항전을 벌여 마침내 이들을 물리친다. 성 주변의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으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유래했다. 이것이 관민이 일치단결해 일궈낸 행주대첩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권율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왜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으며 투석전이 승리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행주치마에 행주대첩 싸움에서 유래됐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심지어 행주산성 권율 사당 충장사 앞에 1979년 세워진 ‘행주대첩비’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행주치마에 관한 글만 빠져 있을 뿐 활과 돌을 주 무기로 해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충장사의 행주대첩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군(전라감사 권율)은 약 4,000명을 거느리고 (1592년)9월 수원 독성(독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평양, 황해도 및 개성을 나누어 점령하였고 후방 부대들은 서울에 모여 있었다.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앞에 나아간 적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이듬해(1593년) 2월 2천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 때는 중국에서 파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 및 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달 12일 수만의 군대를 동원하며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성안에서 활을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가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을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세 차례 격전 끝에 적은 마침내 참패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그해 6월 장군은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 권율장군과 행주대첩

임진왜란 초기 권율장군은 광주목사로 있었다.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나 용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전투에서 졌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돼 다시 군사를 이끌고 한양수복작전에 나섰다. 권율장군은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인 진산 이치(배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물리쳤다.

이 전공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된 권율장군은 1592년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했다. 수원 독산성(禿山城)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등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면 권율은 원수를 갚아야할 인물이었다. 이치전투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죽이고 또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목을 죄고 있는 인물이었다.

권율장군은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부하인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한강 너머에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도록 했다. 조경은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산성으로 이용된 곳이나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성으로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권율은 며칠 뒤 군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와 울타리를 치는 등 성을 수축했다. 이때 소모사 변이중은 행주산성과 가장 가까운 한강 맞은편 양천(陽川)의 궁산성(宮山城)에 진을 치고 권율의 부대를 지원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이 제조한 화차 300량 중 40량을 권율장군의 진중으로 보냈다. 권율장군은 변이중이 보낸 화차를 일본군이 공격해올 능선에 일렬로 배치하고 사격을 준비했다.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3만 명의 병력을 7대(七隊)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격했다. 명나라 군사들이 멀리 도망을 가고 없는 상태여서 행주산성에 있는 3천여 명의 조선관군과 의병과의 싸움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행주산성은 말이 산성이지, 조선군이 서둘러 만든 목책만이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어서 공략하기도 쉬울 것으로 보였다.

설령 한강너머 양천과 금천에 조선관군과 의병이 있다고는 하나 큰 위협이 될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우키타를 비롯해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등 일본군 장수들은 조총부대를 앞세워 행주산성을 공격하면 일거에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한양에서 출발한 일본군은 홍제원을 거쳐 2월12일 새벽 행주산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방책(防柵)이 허술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100여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다.

■ 행주대첩 신화(神話)와 몇 가지 오해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행주산성 싸움 막바지에 조선 군사들이 부녀자들이 치마에 나른 돌을 던져 일본군을 격퇴시켰다는, 비논리적이고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펼쳐 행주대첩을 신화화했다. 역사교육 역시 이런 논리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뤄졌다. 순치적(馴致的)역사지식전달과 수용에 길들여지면서 행주대첩의 진정한 승인(勝因)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성찰을 생략했다.

행주대첩에 대한 상당수 국민들의 인식은 집단적 선입견(Stereo-Type) 혹은 맹목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명확한 사실은 우리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행주대첩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명에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이 왜곡돼 있거나 생략돼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조선관군의 수이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과 함께 싸운 관군·의병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다. 어떤 기록은 1만여 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2천300명으로 돼 있다. <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2월에 ‘권율이 휘하의 장병 4천 명 중에서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정예병 2천300명을 뽑아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이동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행주산성 내 조선군사의 수는 2천300명이 맞는 듯싶다.

두 번째는 ‘투석전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이다. 대답은 ‘아니다’이다. 당시의 행주산성은 돌로 쌓은, 튼튼하고 높은 성이 아니었다. 한강변에 솟아있는 해발124m에 불과한 구릉지에 불과했다. 산성은 허물어지고 없어져 권율은 목책(木柵)을 세워 적의 접근을 막고자 했다. 적과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있는 조선군이 돌로 일본군들을 맞혀 승리했다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더구나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돌이 날아오는 거리보다 조총의 사거리가 훨씬 더 길다. 조총을 든 3만여 명의 일본군이 목책에 의지해 방어진을 치고 있는 2천300명의 조선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구나 행주산성 근방에는 투석전에 쓸 만한 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일대는 홍수기에는 물이 차고, 갈수기에는 갈대밭만 무성한 곳이었다. 개펄 천지였을 뿐 돌이 많은 곳이 아니다.

행주산성 안에 부녀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무리다. 당시 행주산성은 버려진 성이었다.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곳이었다. 권율장군이 한강 건너편에 진지를 마련해야 하는 급한 사정이 있었기에 방어진지로 사용된 곳이다. 일본군을 피해 백성들이 모두 피난간 상태에서 많은 수의 아녀자들이 의병들과 같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소수의 부녀자가 있었으며 이들이 전투막바지에 돌을 날랐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무기가 있었거나, 아니면 신묘한 전술이 발휘됐어야 한다. 그렇다. 행주대첩에는 조선군의 비밀병기가 있었다. 바로 ‘변이중 화차’(邊以中 火車)다. 망암(望菴) 변이중은 1546년 전남 장성의 장안마을에서 태어난 조선의 문신이다. 변이중 선생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조선관군이 가지고 있었던 문종화차의 취약점을 보완, 새로운 화차를 제작해 실전배치했던 인물이다.

변이중선생은 문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창조적으로 개조한 화차 300량을 제작해 이중 40량을 권율장군에게 보냈다. 권율장군은 이 화차 40량을 방어선 최전선에 배치해 행주산성을 공격해오는 일본군들을 대량 살상했다. 이런 신무기가 있었으니 3만 여 명 일본군들의 파상공격을 이겨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변이중선생의 화차가 있었기에 행주대첩이 가능했다는 역사교육과 설명이 매우 부족한 상태다.

 

 

 

 

 

변온섭 이사장과 작가, 장성군 김형남학예연구사
변이중 선생의 삶과 화차를 널리 알리는데 애쓰고 있는 후손 변온섭(邊瑥燮,사단법인 봉암서원 이사장) 선생은 이 같은 아쉬움을 그의 글 <화차火車를 발명한 선비,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 올라가면 대첩기념관이 있다. 임진왜란 3대첩지인 행주산성의 대첩기념관에 있는 벽화는 대첩 당시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벽화와 함께 당시 사용한 병장기와 화차도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전시되어 있는 그 화차는 행주대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화차이다. 그 화차는 문종화차로서 망암이 만든 화차가 아니다. 행주대첩에서 왜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하도록 한 망암의 화차대신 엉뚱한 화차가 그 자리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금도 이처럼 현재진행형으로 왜곡되고 있다’

■ 행주산성 전투의 실상과 변이중 화차

1593년 2월 12일 아침 6시쯤 일본군 제1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봉장은 고니시(小西行長)였다. 조선 군사들은 일본군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화차에서 포를 발사했다. 또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댔다. 궁수들도 활을 쏘았다. 일본군은 궤멸됐다. 고니시의 제1대는 처참한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이후 이시다가 이끄는 제2대와 구로다의 3대도 공격에 실패했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제2성책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권율이 군사들을 엄히 지휘해 이를 잘 막아냈다. 일본군 5대와 6대는 성책에까지 이르러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 역시 패퇴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 군사들은 기진맥진했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부대의 일본군은 마침내 행주산성 안에까지 쳐들어왔다. 백병전이 시작됐다. 그런데 때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이 배 두 척에 군사를 싣고 와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은 행주산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대승리였다.

행주전투는 변이중 화차가 일본군 선봉대와 그 뒤로 이어진 일본군의 예봉을 꺾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목책 앞에 산처럼 쌓인 시체를 넘어 공격해오다가 또다시 화차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1대부터 7대까지, 계속해서 공격해오는 3만여 명의 일본군을 2천300명이 막아낸 것은 변이중 화차의 가공할 능력과 조선 군사들의 용맹함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변이중 화차의 성능

변이중 선생은 기존의 문종화차의 취약점을 전면적으로 보완해 새로운 화차를 제작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문종 화차는 곡사화기인 신기전기나 사전총통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인 반면에 변이중 화차에 장착하는 총통기는 승자총통(勝字銃筒)으로 철환(鐵丸)을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변이중 화차는 철환을 사용하는 직사화기로서 명중률과 살상력이 매우 높았다.

여기에다 일본군의 조총사격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통수를 보호하는 방호벽을 설치했다.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당연한 보호시설이었지만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호벽이었다. 게다가 운용방법도 상당히 탄력적이었다. 전면과 좌우측면에 승자총통을 장착토록 해 어느 방향에서 적이 공격해오더라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했다.

변이중 화차에는 전면에 14개, 좌·우 측면에 각각 13개 등 40개의 승자총통을 장착할 수 있었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총알이 발사하는 형태로 승자총통 1개가 최대 15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전방에 210발, 좌우 방향으로 각 195발 씩 모두 합하여 600발을 짧은 시간 내에 반복 발사할 수 있었다.

변이중 화차에 대한 역사 기록은 신경(申炅:1613-1653)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홍봉한(洪鳳漢:1713-1778)의 <군려류>(軍旅類),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조대왕(正祖大王:1752-1800)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보인다.

이 기록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 300량을 만들었다. 그 구조는 화차에 구멍 40개를 뚫어 승자총 40령을 끼워 연속으로 발사하게 하였다. 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입은 바 크다’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의 거북선이, 육지에는 망암 변이중의 화차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건재할 수 있었다. 국방과 주력무기 개발 중요성을 깨달아 변이중 선생이 개발한 화차는 사실 조선을 구해낸 신병기랄 수 있다. 이런 의미가 있기에 근현대 사학자들 사이에서 ‘화차는 탕크(tank)의 祖’(최남선), ‘화차는 기관총과 탕크의 원조’(이윤재), ‘과거 조선의 발명적 천재’(김용관), ‘문종화차를 획기적으로 개량한 신제품’(박성래)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던 것이다.

■ 망암(望菴) 변이중 선생의 생애

망암 변이중 선생은 154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3세부터 3년간 청계(淸溪) 박원순(朴元恂)에게 배운다. 22세가 되던 1567년 봄에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만나 제자가 된다. 1584년 율곡선생이 타계한 후 율곡선생의 가족들이 가난에 시달리자 이를 돌봐주었다가 반대파당인 동인들의 미움을 사 파직됐다.

선생은 1588년에 평안도 도사에 복직됐다가 곧 형조정랑에 임명된다. 그 이듬해에 풍기군수에 제수된다. 1591년(선조 24년) 겨울에 어천(魚川:지금의 평안도 연변) 찰방(察訪)으로 좌천된다. 이 역시 동인들의 의도적인 해코지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이 터질 때 선생은 어천찰방으로 재직 중이었다.

선생은 말 200여필을 마련해 선조의 파천 행차를 돕는 한편 선조가 피난행차를 멈추고 군사를 수습, 일본군과 맞서 싸울 것을 상소했다. 1592년 9월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10월에 특명으로 전라도소모사(全羅道召募使)가 됐다. 소모사(召募使: 군사를 모집하는 관리)가 된 선생은 40여 일 만에 수만의 의병을 모집했다.

그해 12월 선생은 군량미 조달을 위한 전라조도어사(全羅調度御史)라는 직책을 맡는다. 선생은 두 차례 조도어사(調度御史)와 세 차례 독운사(督運使) 임무를 맡아 수만의 병사와 수십만 석의 곡식을 모아 일본군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은 특히 임진년 10월에 소모사로 전라도에 내려와 4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300량의 새로운 화차를 제작하는, 믿기지 않는 일을 해냈다. 선생과 변씨 문중은 사재를 털어 화차를 제작했는데 선생은 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병서와 병장기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를 꾸준히 해왔었다.

선생은 스승인 율곡 이이가 1584년 타계하자 ‘나라를 위해 불가불 갖추어야 할 것은 군사력이다’며 사전에 화차 제작도를 만들어놓는 등 비상시국에 대비했다. 선생은 가장 시급한 것이 일본군의 조총에 맞서 싸울 무기를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문종화차를 개량해 화력과 살상력을 높였다. 화차에는 방탄벽을 설치해 군사들을 보호했다. 강력하고 안전한 신병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선생은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2년 후에 사직하고 장성으로 돌아왔다. ‘장성 향헌 20조’를 만들어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풍습을 다시 바로 세우는데 애썼다. 전란 후에 호성원종공신 1등,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됐다. 1611년(광해군 3) 66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사후에 이조참판의 벼슬을 내렸다.

■화차 제작지였던 서삼면 공평리와 북이면 조양리 야산

 

 

 

 

 

 

서삼면 공평리(송현마을) 화차제조지. 지금은 대나무 밭으로 변해버렸다.

 

 

북이면 조양리 화차제조지. 김형열씨가 화차제조장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성문화원 향토연구소장인 김형열씨의 연구조사결과에 따르면 변이중선생이 화차를 만들었던 곳은 장성군 서삼면 공평리(송현마을) 야산과 북이면 조양리 야산 두 곳이다. 김형열씨는 망암 변이중 선생이 개발한 화차 때문에 조선 군사들이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1993년 <소설 변이중>을 펴내기도 했다.

김형열씨는 화차를 만든 곳을 찾아내기 위해 수년을 수소문한 끝에 어르신들의 증언과 현장 확인을 통해 화차제작지로 추정되는 두 곳을 찾아냈다. 1986년의 일이다. 현장조사 당시 화차제작지 일부는 개간이 돼 밭이 돼 있었고 개간공사 중 걷어낸 흙들이 여러 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화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땅속에 묻혀 있다가 흙을 퍼내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현장조사에 나선 전문가들은 철을 만든 곳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초 작가는 변온섭 선생, 김형열씨, 장성군청 김형남연구사 등과 함께 화차제작지 현장을 찾아갔다. 화차제작지가 있었던 공평리와 조양리 야산 일대는 대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여져 있어 그곳이 화차 제작 터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풀 섶을 조금만 뒤져도 철성분이 많이 함유된 돌(사철:砂鐵)들이 여기저기에서 쉽게 나뒹굴고 있었다. 예전에 화차를 만드는 곳이 분명했다. 철 성분 함유량이 많은 사철이 수두룩했다. 그렇지만 300량의 화차를 쇠 가마등을 징발해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디선가 철을 파내야 했다. 김형열씨는 공평리 산 너머 쪽에 예전에 철광산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제철을 하려면 센 불을 피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땔감으로 쓸 나무가 충분해야 한다. 공평리와 조양리 야산은 제법 큰 편이어서 큰 나무들이 빽빽한 편이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기다 두 곳 모두 산과 산 사이의 움푹 파인 계곡에 위치해 있어 눈에 잘 띠지 않는 곳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상황이 딱 맞아떨어진다. 변온섭 선생과 김형열씨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국난극복의 현장이 이처럼 방치돼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부차원의 사적지 지정과 호국순례코스로서의 관리·정비가 절실하다.

■ 변이중 선생과 변이중화차, 행주전투 순국무명용사에 대한 기념사업
 

명명식기념사진. 60사단 포병연대의 부대명이 변이중포병연대로 바뀌었다.

변이중 선생의 후손인 변온섭 선생은 변이중화차와 행주대첩에서의 화차의 기여도를 널리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변온섭 선생이 안타까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신무기 변이중 화차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정당한 평가와 인식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행주산성 대첩기념관에서조차 문종화차를 전시해 관람객들이 ‘문종화차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무기로 오해하는’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온섭선생은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는 1451년에 만들어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안주에 20량, 영변에 2량만이 배치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행주대첩에서 사용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다.

변이중 화차를 널리 알리려는 변온섭 선생과 전남도·장성군의 노력은 마침내 상당한 결실을 이뤘다. 지난 2011년 11월 28일 장성군 동화면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복원화차 발사시연회가 열린 것이다. 변이중화차는 전쟁기념관 박재광 박사 등 고무기(古武器)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됐으며 이날 매우 성공적으로 시험발사가 진행됐다.
 

복원된 변이중화차 발사장면

변이중 선생의 이름이 부대 명으로 불리게 된 것도 뜻 깊은 일이다. 호국인물을 부대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육군 60사단은 권율부대로 불리고 있다. 권율부대는 지난 2017년 4월 19일 사단 예하 포병연대의 부대 명을 변이중포병연대로 정하는 명명식을 거행했다. 변이중 선생이 권율장군에게 화차 40량을 보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린 것이다.
 

복원된 변이중화차 발사장면

한편 행주산성 대첩을 이끌어낸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에 대한 조명작업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행주대첩의 주역은 바로 권율장군을 따라 한양까지 진격해갔던 호남의병들이다. 행주대첩은 ‘역사바로세우기’의 대상이다. 행주대첩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변이중 선생에 대한 국가차원의 선양작업이 절실하다.

■ 봉암서원(鳳岩書院)
 

장성 봉암서원 전경

종앙사봉암서원은 변이중 선생의 학문과 우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후학을 양성해 나라의 기둥으로 삼고자 하는 뜻도 있다.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장안리)에 위치해 있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종앙사(宗仰祠)에는 변이중 선생을주벽으로 해 율진 윤진(尹軫), 휴암 변윤중(邊允中), 자하 변경윤(邊慶胤), 명산 변덕윤(邊德胤), 청류당 변휴(邊烋), 묵포 변치명(邊致明)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낸다.
 

변이중 화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변온섭 이사장과 김형열 소장(맨 좌측), 김형남 연구사(맨 우측). 뒤에 보이는 건물이 봉암서원이다.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장안리)에 위치해 있다.

도움말= 변온섭, 김형열, 김형남, 강정인, 김세곤, 정만진

사진제공= 위직량, 류기영, 장성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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