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돌아 오르는 길마다 사연가득 노령옛길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7. 장성갈재(노령옛길) 이야기
굽이돌아 오르는 길마다 사연가득 노령옛길
노령 옛길, 남도사람들 한양천리 길의 초입
험한 탓에 고갯길 양쪽 주막에서 자고 넘어
지금 장성갈재는 일제가 만든 신작로(新作路)
수탈위해 갈재 밑에 터널 뚫고 호남선 개통
눌재선생·장검도둑·동이 등 각종 이야기 많아
인적 끊긴 뒤 잡목 들어서 옛길 찾기 힘들어

■노령(蘆嶺) 옛길
 

노령옛길(고갰길). 갈재는 전라도 아래쪽과 한양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옛사람들은 갈재를 걸어서 넘었다. 이길은 노령옛길이다. 노령옛길은 일제 시대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있는 노령옛길에는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수 없기 때문이다. 장성 갈재가 그런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갈재는 전라도 아래쪽과 한양(서울)을 이어주는 통로다. 옛사람들은 갈재를 걸어서 넘었다. 아중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갈재는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다. 이른바 노령옛길이다.

‘노령(蘆嶺)’은 갈재에서 나온 말이다. 갈재는 산 정상에 갈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부 고지도에는 지금의 갈재를 ‘갈령(葛嶺)’이라 표시한 것이 발견된다. 갈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노령 역시 일제가 한반도의 산맥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름이다. 갈대를 뜻하는 노(蘆)자와 큰 산줄기를 의미하는 영(嶺)을 합쳐서 노령이라 한 것이다.

노령옛길

노령이라는 말은 일제강점의 오욕을 안고 있는 말이기에 바꿔 부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갈재라는 말도 갈대와 억새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갈대는 바닷가와 하천지역에 분포하고 억새는 산간지역에 있는 풀이다.

그런데 생김새가 비슷해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지 않고 부르다보니 억새재라 할 것이 갈재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오해와 일제의 억지명칭이 합쳐져 억새재가 갈재가 되고, 갈재가 노령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상 노령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지라도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이 나왔는지는 알아둘 필요가 큰 것 같다.
 

노령산맥(지도)

노령옛길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목란마을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 사이에 있던 길이다. 노령고개는 서쪽의 방장산(742.8m)과 동쪽의 입암산(626m)사이 가장 낮은 부분이다. 이른바 안부(鞍部)에 해당된다. 노령옛길은 옛사람들이 험한 노령산맥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쉽게 넘기 위해 오가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다.

노령옛길은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는 오솔길 형태였다. 최대한 빨리 넘어가기 위해 비탈진 곳이라도 길을 냈기에 다소 가파른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다. 전체옛길을 찾기가 힘들다. 일제 강점기 근대화과정에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장성새재’가 생기면서 인적이 끊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자 그 길은 곧 나무와 풀에 묻혀 잊혀진 길이 되고 말았다.

■신작로 장성새재가 생기자 인적 끊긴 노령옛길
 

갈재안내판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의 장성갈재를 노령옛길로 혼동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숱한 전설과 이야깃거리를 남겼던 갈재는 노령옛길이다. 지금의 장성갈재는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목란마을과 전북 정읍시 대흥면 사이에 있다. 장성갈재는 일제가 호남곡창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더 많이 일본으로 싣고 가기위해 국도 1호선(목포~서울~신의주)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겼다. 즉 옛길이 아니라 신작로(新作路)인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오가며 호남곡창의 기름진 쌀을 실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서둘러 호남선을 개통시켰다. 호남선도 어김없이 갈재를 지나가야만 했다. 기찻길을 만들기 위해 갈재 밑으로 터널을 뚫었다. 1914년 1월 광주 송정리와 전북 정읍을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완공되면서 호남선이 생겨났다. 한참 뒤에 생긴 호남고속도로와 고속철(KTX)도 마찬가지다.
 

호남선입암옛철길

그래서 갈재에는 모든 형태의 길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걸어 넘는 길, 자동차가 다니는 길, 옛 기찻길, 고속철도 길까지…모두 8개의 이런저런 길이 갈재를 통과하고 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니, 그만큼 많은 일이 벌어지던 곳이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10여분이면 넘는 고개 길이지만 예전에는 만만치 않은 고갯길이었다.

■군사들이 머무르며 고개 넘는 사람들 보호했던 군령마을
 

군령마을전경

갈재는 정읍평야와 나주평야가 마주치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양 벌떡 일어나 양팔을 벌려 밀쳐내고 있는 지세(地勢)다. 두 평야를 갈라 쳐 막아내고 있는 고개니 험한 고개일 수밖에 없다. 입암산과 방장산을 거느리고 있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버티고 있는 곳이니 그리 호락할 리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산적이 많아 오가는 이들이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갈재는 한양에서 해남으로 통하는 해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관리들이 이 길을 통해 부임했고 전라도 오지나 섬으로 귀양을 오는 대신들도 갈재를 넘어서 왔다. 백양사역 근처에 있던 미륵원과 입암면사무소 근처에 남아 있는 천원역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해남대로를 오가던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숙소와 음식, 그리고 말들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국가가 관리하는 삼남대로 중의 하나에서 도적떼들이 들끓으니 이만저만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군사들을 산 밑에 두고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노령보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대낮에도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개를 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중종 15년에 보(堡)를 설치해 지키다(防守)가 뒤에 폐지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
 

군령마을주막골터 안내판

노령옛길 북쪽인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 군령마을이 바로 예전에 군사들이 머물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노령옛길 입구인 군령마을에는 예전에 주막집이 10여개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북쪽에서 넘어오는 길에 군사들이 주둔했던 병영이 있었고 주막집들이 즐비했다면 고개 남쪽인 장성 북이 목란마을에도 군사시설과 주막집들이 많았을 것이다.

화적떼가 들끓었던 조선시대에는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산을 넘으려는 사람들로 고개 양쪽마을이 항상 북적였을 것이다. 도둑들이 없어진 뒤로도 땀 흘리며 고개를 넘은 이들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느라 성시를 이뤘을 것이다. 그런데 장성새재가 생긴 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목란마을과 군령마을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방등산가

갈재(노령옛길)가 자리한 방장산(方丈山:방등산)은 산세가 깊은 탓에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털어먹는 도적이 많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도적떼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백제나 통일신라 때에도 산적들은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해치거나 심지어 마을까지 내려와 여자들을 납치해 데려갔다고 전해진다.

방등산가는 선운산가와 무등산가, 정읍사, 지리산가와 더불어 백제 5가의 하나이다. 방장산 일대 산적에게 끌려간 여인이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지아비를 원망하는 노래로 알려졌다. 방등산가는 <고려사악지>에 노래의 제목과 유래가 기록돼 있으나 가사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 악고(樂考) 17에도 <반등산가(半登山曲)>가 실려 있는데 두 작품의 내력은 동일하다.

전북 고창군은 지난 2014년 방장산 억새봉에 ‘방등산가비’를 세우고 이를 문화자산으로 삼고 있다. 방장산은 그 산세가 수려해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러 온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방장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나올 것을 경계하여 쇠말뚝 다섯 개를 박았으며 일제 역시 그리했다. 이 쇠말뚝은 모두 제거된 상태다.

장성군과 고창군·정읍시 경계에 있는 방장산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린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고흥 외나로도에 있는 산)·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오름)을 말한다. 과거에는 방등산이었지만, 중국의 방장산과 닮았다고 해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방장산은 넓은 산이 백성을 감싸준다는 의미다.

■갈재설화 <장검도둑이야기>
 

장성갈재

갈재에는 <장검 도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옛적에 갈재 아랫동네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부자는 자기가 아끼는 딸을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갈재고개에서 큰 칼을 차고 지나가는 사람의 돈을 빼앗으며 “내가 사는 곳은 죽은 나무 고장이고 내 성은 살림 찌꺼기이며 이름은 탈상 찌꺼기이다. 나를 찾아오면 돈 보따리를 주겠노라” 하고 돈을 빼앗은 뒤 쫓아 보냈다.

어느 날 갈재를 넘던 망건 장사꾼이 이 부자에게 돈을 빼앗겼다. 억울한 마음에 전국을 돌며 이 도둑을 수소문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주에서 어떤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장면을 보게 됐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님역할을 하는 아이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죽은 나무가 쓰이는 것은 장승이니 도적이 사는 곳은 장성이고 살림살이가 찌꺼기란 것은 박적(바가지)을 의미하니 도적의 성은 박씨이다. 마지막 탈상 찌꺼기라는 것은 건(두건)을 말하니 당신이 찾는 사람은 장성 사는 박건을 찾아가시오”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대로 장성의 박건을 찾아가니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돈을 빼앗아간 사람이었다.

박건은 망건 장사꾼의 손을 붙들고 어떻게 해서 나를 찾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망건 장사꾼은 공주에 만났던 아이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박건은 망건 장사꾼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공주로 그 아이를 찾아갔다. 그런 다음 그 아이를 사위로 삼았다. 믿거나 말거나 식 이야기지만 갈재에 그만큼 도둑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갈재와 천원차(川原茶)

갈재는 예전에 위령(葦嶺) 혹은 노령(蘆嶺)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위와 노는 억새(갈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갈대가 많은 곳은 좋은 차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갈재 아래쪽 장성과 고창에는 좋은 차밭이 많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이 갈재를 지나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남겼다.

언덕 평평하고 나무들은 먼 곳에 있어 아스라한데 /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 가득해 어둡지만 / 능악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梅月堂詩集卷之十一 詩○遊湖南錄

原平宜遠樹。曖曖接人家。地饒田收?。山低貢有茶。

蘆峯雲?淡。楞岳岫?牙。收拾江湖景。登臨日半斜。)

매월당이 노래한 차가 바로 천원차(川原茶)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서 생산되는 천원차는 맛이 깊다. 일제강점기에 오가와가 1913년부터 개간을 해 1923년부터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으로 가져가 판매했는데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천원차를 즐겨 마시는 이들이 많다.

■동이 샘(갈재 오아시스 샘)
 

동이샘물

갈재 구목란 마을 근처에는 조선 숙종때 숙빈 최씨(동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샘이 있다. 장성군은 이 샘을 ‘길객의 오아시스 샘터’라 이름 짓고 있다. 단순하게 ‘동이 샘’이라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동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태인 땅에 살고 있었던 동이는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동이에게 어떤 스님이 네가 살려면 장성 갈재 샘터로 가라고 말했다. 동이는 스님의 말에 따라 물어물어 갈재 샘터를 찾아왔다. 동이의 형색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때 마침 나주 부사로 부임하는 민돈중이 갈재샘터를 지나게 됐다. 민돈중은 동이를 서울로 데려왔다. 동이는 창덕궁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인현왕후도 구하고 자신도 숙빈이 돼 영조임금을 낳았다”

동이 샘에 얽힌 이야기가 사실인지, 혹은 나중에 꾸며댄 이야기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갈재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 갈재 샘터와 동이이야기가 얽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갈재 샘터에서 드라마로 유명해진 동이의 예쁜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재미중의 하나다.

동이샘물

■빨치산이 활동했던 갈재와 차일혁 경찰관

6·25전쟁 중에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의 일부가 산세가 험한 방장산과 입암산 일대에서 빨치산(파르티잔)으로 활동했다. 빨치산 부대인 왜가리 부대는 갈재를 넘어오는 인명을 해치고 차량들을 파괴하면서 국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 왜가리 빨치산 부대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부대가 차일혁이 지휘하고 있던 제18전투경찰대대였다. 1951년 4월 중순경 당시 유명했던 백조가극단이 광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전주로 가던 중 갈재 부근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타고 가다 피해를 입었다. 트럭 3대 중 2대가 불타고 단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백조가극단은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전옥이 단장을 맡고 있었다. 김승호와 최남현, 황금심, 고복수, 원희옥, 김영준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단원이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차일혁 부대가 반격에 나서 백조가극단원들의 생명을 구했다. 차일혁은 공포에 떨고 있는 단원들을 안심시키고 잠시 쉬도록 한 뒤 전옥 단장에게 부대원들의 사기를 위해 잠시 공연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전 단장은 당연히 반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총탄이 빗발치는 곳이었는데, 또 언제 빨치산들이 다시 기습을 해올지 모른 상황이어서 도저히 승낙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차일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대원들을 위해서 용기를 내 공연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백조가극단은 장성 갈재에서 제18전투대원들을 위해 ‘산중공연’을 했다. 산 능선 먼곳에서는 빨치산들이 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 전투대원과 빨치산이 잠시 전투를 멈추고 함께 공연을 보는 묘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공연도중 기습을 가해왔다. 그러나 차일혁부대가 이를 물리쳤다. 단원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공연을 끝까지 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차일혁

차일혁은 우리의 예술과 문화재를 지키는데 남다른 정열이 컸던 인물이다. 갈재 산중공연으로 맺은 인연을 살려 빨치산 토벌이 끝난 후 충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시에는 백조가극단을 초청해 공연을 가졌다. 경찰서 옆 빈 건물을 극장으로 개조한 뒤 백조가극단과 판소리 명창인 임방울 선생 등을 초청하여 공연토록 한 것이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빨치산 토벌 중에도 영화촬영을 지원해 국내 예술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1951년 5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우려가 있다며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절 문짝만 떼어내면 빨치산에 대한 사격이 가능하다며 문짝만 불태웠다.

차일혁의 고뇌어린 결단 때문에 천년고찰 화엄사가 살아난 것이다. 1998년 화엄사는 차일혁 공적비를 세워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문화재청은 2008년 그에게 감사장을 전했다. 정부 역시 차일혁이 국내 예술발전을 지원하고 문화재를 보호한 공로가 크다며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차일혁은 우리나라 경찰관으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6·25전쟁과 장성 갈재 전투

장성갈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7월 21일 전주와 남원까지 진격했다. 7월 22일 북한군 제6사단은 정읍을 점령했다. 북한군 6사단은 광주와 순천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북한군 6사단 일부는 서해안을 따라 영광~목포 방향으로, 또 일부는 남원~곡성~구례 방향으로 진격했다.

정읍을 점령한 북한군 6사단 15연대 일부 병력은 영광을 거쳐 나주로 진격해왔다. 그다음 목표는 광주였다. 북한군의 공격축선은 나주~장성~광주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행정·교통의 중심지인 광주를 점령하면 사실상 전남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전남관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북한군의 호남점령에 대비해 목포와 여수에 보관 중이던 정부양곡을 반출토록 했다. 또 전남방직에 있던 광목들을 여수로 옮기도록 지시하는 등 몇 가지 비상조치를 취했다. 한편으로는 학도병들을 모으도록 지시했다. 이응준 소장은 북한군이 장성을 통해 광주로 진격한다는 정보에 따라 7월 21일 예비군으로 편성된 26연대를 7월 장성 갈재에 배치해 북한군을 저지키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남도경찰국 김응권 경무에게 장성 갈재를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명령에 따라 광주경찰서장 이재욱 총경이 광주경찰 500여 명을 이끌고 장성 갈재로 향했다. 그리고 야산 중턱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경찰이 보유한 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경찰 3명당 총이 1정 밖에 없었다.

당시 군경합동 부대원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소총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과 제3 육군병원(과거 광주시 쌍촌동에 있었던 국군통합병원의 전신)에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었던 부상병들의 M1 소총 몇 정이 전부였다. 나머지 병력은 돌을 주워 던지거나 백병전 때 맨주먹으로 맞붙는 식으로 싸워야 했다.

부랴부랴 군경합동부대를 편성해 방어진지를 세웠지만 총이 없어서 전투를 치르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총을 든 북한군에 맞서 맨주먹으로 백병전을 치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국군 5사단 26연대장 이백우 중령은 장성 갈재에 병력을 3줄로 종심 배치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1열 병력에게 총을 지급했다.

1열 병력이 사격을 하다가 적이 근접해오면 그다음 2열에 총을 건네주고 가장 뒷줄로 이동토록 했다. 또 2열이 총을 들고 싸우다 3열에 총을 넘겨주고 뒤로 후퇴하는 식으로 전투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탱크 사격과 함께 맹렬히 공격해오자 방어진은 급속히 무너졌다. 북한군들이 총을 쏘면서 공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맨 앞의 1열 병력이 2열 병력에게 총을 건네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총이 없어 맨주먹으로 북한군에 맞서는, 참으로 어이없으면서 한편으로는 원통했던 일이 갈재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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