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아버지의 도전

평범한 아버지의 도전

<최유정 동화작가>
 

벌떡 일어났다. 신문사에 보내야 할 글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써야할 지 갈피조차 잡아 놓지 않은 상태라 잠을 자는 중에도 내내 시달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눈이 떠진 것은 미뤄놓은 일에 대한 불안과 초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5시 27분. 본능적으로 나를 깨워준 불안과 초조에 감사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10시부터 약속이 있으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곤 지금밖에 없었다. 나를 깨워준 본능에 감사하며 어제의 일상을 찬찬히 되짚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일 터. 일상에서 글의 실마리 역시 찾아야 했다. 문득 어제 만난 얼굴이 떠올랐다. 입양부모 모임에서 만난 목사부부였다. 나는 오랜만에 호젓한 시간을 가졌던 어제의 만남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두 분의 선한 미소가 떠올라 나도 몰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입양부모다.

생후 10개월, 뱃속의 아이가 팔딱거릴 때의 느낌마냥 나는 태어난 지 10개월 밖에 안 된, 실핏줄이 퍼렇게 드러날 정도로 얼굴이 창백했던 아기가 내 가슴에 안겨 팔딱거리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던 그 순간 역시 잊을 수가 없다. 어제 만난 입양부모와도 그 순간을 이야기 했었는데 느닷없이 몰려왔던 미안함과 감사함. 그 순간 느꼈던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미안함과 감사함은 사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때때로, 틈틈이 나 역시도 ‘다름’을 인정하고 있지 않구나, 싶은 깨달음이 천재지변처럼 나를 덮쳤고 나는, 힘들었을 그 모든 순간을 묵묵히 견뎌내 준 아이가 너무 대견했다. 위대해 보였다. 그래서 아이를 껴안고 엉엉, 펑펑 울었더랬다. 아이는 이유도 없이 저를 껴안고 우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 등을 토닥여줬었다. 나는 그 새털처럼 보드라운 손, 그 작은 손의 온기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어제 만난 입양부모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단어는 ‘자존’이었다. 스스로 자(自)에 중할 존(尊), 스스로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 입양아들은 탄생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존감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부모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 낳아 준 부모와 살며 눈부신 성장을 이뤄나가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과정. 그 과정을 원초적으로 박탈당한 아이들에게 자존감 상실은 어쩌면 자연스런 과정일지 모른다. 공개입양부모들은 그래서 때때로 모여 아이의 자존을 세워나갈 갖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더불어, 함께 대처해 나간다. 나 역시 공개입양부모 모임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덕분인지 올해 스무 살이 된 딸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줬다. 이 모든 것이 다 주변의 힘이고 ‘더불어’의 힘이다. 다 덕분인 것이다.

물론 ‘자존’, 스스로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세워나가는 문제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특히,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판단의 기준점이 ‘나’가 아니라 엄마 친구의 아들과 딸인 우리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고 입양아들을 바라보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선 유별나게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자. 나는 비온 뒤 땅이 더 단단해 지듯 힘듦을 이겨낸 성장은 보다 더 눈부실 거라 생각한다. 자존감 상실이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자존의 꽃을 피워낼 거라 확신한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살피는 과정에서 더 단단한 자존이 만들어질 거라 믿고 단언한다.

입양아들이 힘듦을 이겨내는 과정, 자존감 상실을 경험하는 과정, 탄생으로부터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은 남과 다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드는 허약한 사회를 견뎌낸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이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존’이란 내 안의 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며 내 안의 나를 끊임없이 발견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입양아들은 자신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더 단단하고 더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입양아인 딸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지금도 딸아이가 더 단단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딸아이는 지금 이순간도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끄집어내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나는 딸아이가 자신의 문제로부터 자신에 집중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딸아이가 참, 멋져 보인다. 참, 잘 자라주었다.

어제 만난 입양부모가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출마한 남편에게 물었다.

“왜 정치를 하십니까? 왜 그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쓰던 원고도 멈추게 하고 나를 거리로 나서게 한 남편, 책 한 줄 읽을 여유조차 없는 분주함으로 나를 내몬 남편. 하지만 오늘은 남편의 대답을 끝으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딸아이가 편견 없는 사회에서 살 길 바랍니다. 다름이 인정되는 사회에서 살 길 바랍니다. 딸 키우는 아버지의 평범한 소망이 그대로 이뤄지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정치를 시작했고 앞으로 더 열심히 더 잘, 해나갈 것입니다.”

나는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던 목사 부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남편이 자랑스러워지는 시간. 서울로 유학 가 있는 딸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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