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원림, 물과 돌·꽃·건물이 한 몸인 듯 그렇게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8. 담양 소쇄원(瀟灑園) 이야기

소쇄원 원림, 물과 돌·꽃·건물이 한 몸인 듯 그렇게

소쇄원, 전남의 3대 정원 중 하나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 그대로

양산보, 스승 조광조 유배 뒤 죽자

권력·벼슬의 무상함 깨닫고 원림 조성

담양의 또 다른 원림 명옥헌(鳴玉軒)

물 흐르는 소리…옥이 부딪히는 듯해
 

소쇄원 입구

■소쇄원(瀟灑園)과 오리 두 마리

무등산 자락과 맞닿은 전남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소쇄원,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식영정 등 많은 누각과 정자, 원림들이 곳곳에 있다. 특히 소쇄원은 강진 백운동정원, 완도 부용동정원과 더불어 전남의 3대 정원 중 하나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소쇄원 입구의 청둥오리

소쇄원 입구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계곡에 있는 청둥오리 두 마리를 볼 수 있다. 오리집까지 마련된 것을 보니 누가 일부러 키우는 것 같다. 소쇄원과 오리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조선 중종 때의 선비였던 양산보(梁山甫)는 창평에서 창암 양사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곳 계곡에서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하루는 물오리가 헤엄치는 것을 따라 올라가다가 지금의 소쇄원 자리를 발견했다. 너럭바위로 흐르는 계곡이 깊어지면서 작은 폭포와 못을 이루고 주변 풍광이 수려해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젠가 이곳에 와서 살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처사공실기(處士公實記)>에 전한다.

양산보는 15세 때 청운의 뜻을 품고 정암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당시 중종이 다스리던 조선은 기득세력인 훈구파의 득세로 부패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조광조가 이들 세력에 맞서 새로운 개혁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위협받은 훈구파의 간계로 조광조를 비롯해 뜻을 같이했던 사림의 선비들이 숙청됐다.

그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였다.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화순)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스승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양산보는 권력과 벼슬의 무상함을 깨달았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소쇄원 원림은 1천400평에 달한다. 계곡을 낀 야산에 조성됐다.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머물며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이라는 뜻에서 ‘별서원림(別墅園林)’이라고도 불려진다. 사방이 온통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원림을 정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른 의미다. 정원은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를 그대로 조경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적절한 위치에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면서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 원림이다. 양산보는 자손들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소쇄원을 아꼈다. 그의 발자취와 손길이 가득한 소쇄원은 15대에 걸친 후 손들이 지금까지 복원·관리하고 있다.

■오곡문(五曲門)
 

오곡문과 겨울에도 볕이 잘 들어서 붙여졌다는 애양단

소쇄원에는 오곡문이라는 출입구가 있다. 담 아래 돌기둥을 만들어 계곡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흘러든 계곡물이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오곡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옆으로 소쇄원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담장이 있다. 지금은 뚫려있지만 담장 밖으로 통하는 길에는 원래 일각문이 있었다고 한다. 내원과 후원을 구분하는 낮은 돌담이 ㄱ자 모양으로 정원을 두르고 있다.

담에는 오곡문과 함께 ‘애양단(愛暘壇)’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애양단은 겨울에도 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효의 공간으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가장 빨리 녹는 따뜻한 곳이다. ‘소쇄원 48팔영’ 가운데 ‘애양단의 겨울낮’(愛陽冬午)에서도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는 대목이 있다.
 

소쇄원 담장에 쓰여 있는 ‘소쇄처사 양공지려’

이어진 담장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송시열의 글자판이 박혀있다.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이다. 독목교(獨木橋)라는 통나무 다리 밑으로는 오곡문 담장 밑을 거쳐 온 물들이 다섯 번 굽이쳐 돌면서 흘러내려 간다. 계곡물은 굽이굽이 오곡류를 이루며 흐르다 떨어진다. 일부는 홈이 있는 통나무로 흘러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라는 두 개의 네모난 연못을 이룬다. 이 물은 물풀과 물고기를 키우고, 넘쳐서 흐르는 물은 조그마한 장식용 수차를 돌려 광풍각 아래 협곡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기법은 낭만적이면서도 풍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소쇄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다. 시냇가 건너편으로 ‘광풍각(光風閣)’이라는 정자가 있다. 위쪽에는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霽月堂)’이 자리한다. 광풍각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사방이 마루로 뚫려있고 한 가운데가 온돌방으로 된 형태이다. 모든 문을 개방할 수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건물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즐긴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온돌에 불을 지펴 따뜻함을 나누었을 것이다.
 

흐르는 시냇물을 막지 않고 돌로 구멍을 만들어 담장을 세웠다.

광풍각에서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폭포, 바위에 부딪는 물방울, 자연의 정취 등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은 숲과 새 울음소리,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듣기에는 아쉬웠나보다. 굴뚝을 아래로 내어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운해의 형상을 연출했다. 계곡으로 인해 차가워진 공기가 굴뚝에 서 나오는 연기를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굴뚝연기를 통해 운해의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통나무 다리 밑으로 계곡물이 다섯 번을 굽이쳐서 흐른다.

제월당은 양산보가 거처했던 장소로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개인 하늘에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이 쓴 현판이다. 제월당에서 소쇄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김인후를 비롯해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수양과 학문을 닦으며 때로는 나라를 걱정하고 때로는 풍류를 즐기곤 했다.

제월당 내에는 양산보의 사돈이었던 조선 중기의 문신 하서 김인후가 쓴 시 ‘소쇄원 48영’이 걸려있다. 1548년 소쇄원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소쇄원의 건축적 구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각 공간에 대한 느낌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 시에 나오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엷은 그늘과 밝은 달, 그리고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그리고 관람자의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소쇄원의 모습을 표현했다. 소쇄원은 예술과 감성, 문학이 응집돼 있는 곳이다.

■사시사철 꽃피는 소쇄원
 

담양해설사 박민숙(좌측)씨와 최혁 주필이 대봉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담장 밖으로는 대봉대(待鳳臺)라고 불리는 짚으로 이은 작은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광풍각과 제월당 등 소쇄원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소쇄원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습이 서서히 변했다. 건물들은 낡아 무너지기도 했고, 전란 속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소쇄원의 원래 모습은 1755년 원림의 구조와 건물배치를 자세히 그려놓은 <소쇄원도(瀟灑園圖)> 목판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목판 자체는 분실됐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원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곳으로 평가된다.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는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을 심었다고 한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매화와 복사나무, 여름에는 벽오동과 목백일홍,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나무가 있어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쪽으로 휜 나뭇가지가 조선시대에 문무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 이 하사하던 종이꽃인 어사화를 닮았다.

소쇄원은 물과 나무를 중심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유롭고 풍류적인 분위기는 그 시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유유자적한 모습 속에서도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에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도 느낄 수 있다.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소쇄원은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명옥헌(鳴玉軒)
 

명옥헌 원림 전경

소쇄원 근처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또 다른 원림이 있다. 바로 명옥헌이다. 명옥헌 원림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해 있다. 시냇물이 흘러 한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수량이 적어 실감이 안 나지만 예전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 같다고 해서 명옥헌이라고 했다.

명옥헌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명옥헌은 연못 주변에 심어진 약 20여 그루의 배롱나무로 유명하다. 8월 중순 즈음 여름이 되면 석 달하고도 열흘 동안 붉은 꽃잎으로 연못이 둘러싸인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이다.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오희도는 인조반정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기주관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명옥헌을 짓고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건물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변에 적송, 배롱나무 등 꽃나무를 심어 가꿨다. 숲속에 정자를 짓고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팠는데, 계곡물이 연못을 채우고 그 물이 아래 연못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옥에 부딪히는 소리와 같았다. 배롱나무는 꽃이 핀 지 열흘 만에 떨어지고 100일 동안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운다. 오이정은 떨어지는 꽃잎에서 세상을 떠난 부친을 떠올리며 슬퍼했을 게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이다. 문하생들을 가르치기 좋은 구조로 지어졌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 터가 남아 있다. 명옥헌에는 사각형의 작은 위 연못과 사다리꼴 모양의 아래 연못이 있다. 그 사이에 정자를 세웠다.

연못은 인공적인 석축을 쌓지 않고 땅을 파내어 큰 우물같이 보인다. 아래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 크기다. 자연 암반의 경사지를 골라서 주변에만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세상을 네모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자 건물 위쪽에 있는 연못에는 작은 바위가 섬처럼 놓여 있다. 이 연못 둔덕에도 배롱나무 고목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서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먼저 이 연못을 채우고 다시 흘러서 아래쪽 큰 연 못을 채운다.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조성한 솜씨가 그대로 자연이다. 조상들의 소담 한 마음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명옥헌 계축’ 현판
‘삼고’라고 쓰인 편액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 시절에 전국의 인재를 찾아 호남지방을 방문하며 세력을 모았다. 이때 후산에 머물고 있는 오희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 왔다고 한다.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비롯된 편액글자이다.

명옥헌의 북쪽 정원에는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다.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하여 이 나무를 일명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仁祖大王 繫馬像)’이라고 부른다. 나무의 높이는 30m나 된다. 1980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45호로 지정됐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돼 없어진 상태다.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훗날 우암 송시열은 명옥헌의 영롱한 물소리와 경치에 반해 ‘명옥헌’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명옥헌에 앉아서 보면 주위의 산수 경관이 연못에 그대로 비친다. 오이정은 연못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겠지만 다른 선비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나무와 구름만 보았을까? 아니면 허망하지만 그래도 높이 떠있는 구름을 보면서 자신을 부르는 왕의 기별을 기다렸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옥헌은 마음을 비운 자 만이 자리할 수 있는 곳이다. 아니 번잡한 욕심이 많더라도 그 가운데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어찌 세상의 권력과 재물을 탐할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세상살이가 가끔은 힘들 때, 그리고 좋아하는 이들과 사랑과 정을 더 깊이 나누고 싶을 때, 찾아가기에 좋은 곳이 소쇄원과 명옥헌이다. 그런 보물을 가까운 곳에 두고 사는 우리야말로 축복받은 이들이다.
 

후산리 은행나무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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