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물처럼 동포들이 자유롭게 왕래했으면…”

스무살때 6·25발발하자 북한 싫어서 남쪽으로

군 입대 후 참전도…1953년부터 65년간 광주 거주

‘평남 대동군 용현면 맹정리’ 고향주소 아직도 기억

“대화 잘 돼 고향 가는 길 열렸으면…이번이 마지막”

■실향민 명상엽씨의 남북정상회담 ‘희망가’





명상엽씨가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지난 68년동안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지나온 세월을 설명하고 있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부모님을 꼭 다시 만나리’란 다짐과 함께 20세의 나이로 북녘땅을 넘어 남한으로 간 청년은 결국 스스로의 다짐도 지키지 못한 채 ‘실향민’ ‘이산가족’ 이름으로 68년을 살았다. 1950년 12월 5일 한국전쟁 발발 후 6개월이 지날 무렵, 인민군의 군 강제 입대 조치를 피해 홀로 월남한 명상엽(88)씨. 그는 현재 광주 한 지역에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다.

3남매를 낳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산 그이지만 가슴 한켠엔 항상 허전함이 남아있다. 반세기 넘게 만나지 못한 북에 남겨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어느덧 90세를 바라보는 명씨가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용현면 맹정리 424번지’. 바로 자신의 북한 고향에 있는 집 주소다. 명씨가 광주를 터전 삼아 뿌리를 내린 건 지난 1953년 무렵.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남북 전쟁이 3년여만에 잠정 휴전 됐던 해였다.

이 3년의 순간은 명씨에게 기억하기 싫은 고통으로 남아 있다. 같은 동포를 향해 총 뿌리를 겨누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명씨는 “전쟁이 처음 나고 6개월여 후인 12월 5일 고향을 떠나 혈연단신 도보로 20여일만에 경기도 김포에 도착했다”며 “인민군이 싫어 월남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한국 육군에 입대해 싸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한에 온 지 4일만인 1950년 12월 31일 첫 입대 신고서를 내고 당시 대구지역에 있는 10교육대에서 2주간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에 있는 8사단 16연대 12중대 2소대로 배치 받아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은 비참했다. 총탄은 빗발쳤고, 곳곳엔 수류탄과 포탄이 터졌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점령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다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명씨도 적군이 쏜 총에 등을 맞아 생사를 넘나들었다. 명씨는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상황이 너무도 안타깝고 억장이 무너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 경험했기에 27일 열릴 남북 정상 회담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죽기전 고향을 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생겨서다.

명씨는 “형 두분과 여동생 4명이 있는데 형 두분은 모두 전쟁통에 행방불명됐고, 여 동생들 소식도 끊겼다. 너무 보고 싶은데 대한민국 육군으로 근무했다는 이력 때문인지 이산가족 상봉 신청 때마다 번번히 탈락했다”며 “이 한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냐”고 밝혔다. 자꾸만 흘러가는 세월이 무섭다고도 했다.

그는 “광주에 정착한 뒤 실향민들끼리 만든 5개도 연합회(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함경도)회원들이 처음엔 1개도에 200여명이었는데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고작 1개도에 평균 15명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며 “시간이 얼마 없다. 대화가 꼭 잘 이뤄져 죽기전에 꼭 가족과 고향땅을 밟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명씨는 “대동강이 내가 살던 고향 앞에 흐르던 강이었다”며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처럼 이념과 대립을 넘어 동포가 하나로 화합하고 자유롭게 왕래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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