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87>-제6장 불타는 전투

대둔산 동부 능선 자락에서 발원하는 물이 풍부해서인지 골짜기로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을 따라 펼쳐진 조그만 평야에 여름 햇살을 받은 벼포기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수천의 왜 병사들이 벼포기들을 밟고 물을 철벅거리며 험한 산쪽으로 산을 올랐다. 또다른 대오의 적들은 영정골-살구쟁이를 지나 능선을 오르고 있는데, 건너편 도롱골-바랑산-월성골에도 왜병부대가 오르고 있었다. 이치령 함락을 위해 총공격을 퍼붓는 형세였다. 능선의 바위 틈에서 이들을 정탐하고 있던 정충신이 권승경 부전장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적장 목을 따오는 방법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알았다. 백령부대원들을 풀겠다. 후방부대에서 우리 군이 지원사격을 해주고 있으니 작전하기도 용이하다.”

권승경 부전장도 적정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백령부대는 침투타격을 주임무로 하는 특수부대였다. 적진의 정보 수집과 후방 교란 임무를 수행하는데, 매복전과 기습전에 능했다. 대원들은 하룻밤에 백리를 달리는 주력을 갖고 있었으니 둔갑술을 한다고 소문날 정도였다. 이 부대를 권승경이 자신의 호를 따 특별관리하고 있었다. 정충신이 지금이 출진의 적시라고 본 것도 기습적으로 적장의 목을 따오면 적진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후 유격조가 왜군 복색과 왜군 총검을 하고 적진으로 잠입했다. 적병이 혼재되어 있을수록 활동하기에 유리했다. 조선군이 산꼭대기에서 활을 쏘고, 비거(飛車)를 쏘아올리고, 화포와 철질려탄, 노획한 조총으로 엄호사격을 해주었다. 비거는 김제 출신 정평구(鄭平九)가 발명한 것인데, 적진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비행물체다 보니 왜병들이 새로운 무기를 보고 더러는 겁을 먹고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나자 왜의 선두부대가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후퇴하기 시작했다. 건너편 능선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령부대원 둘이 목이 잘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왜군 두상을 들고 권승경 진지로 들어왔다.

“부전장 나으리! 왜의 야포 두령 목입니다.”

“이놈은 보병 지휘관 두상입니다.”

다른 부대원이 왜군 두상을 양손에 들고 달려들어 왔다. 두 놈 다 눈을 감은 채 쌍통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데 콧등과 이마가 으깨져 있었다.

“수급(首級) 목을 베어왔습니다. 저희 유격대원들이 격살했습니다.”

“왜의 지휘관이 관측병과 매복병을 앞세우고 기세좋게 골짜기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적병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 우리가 매복해 있다가 한 달음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몰살시키고 수급 목을 따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장한 대원이 야전장을 유인해서 처치했습니다.”

“그래서 공격하던 적들이 일시에 무너진 것이냐?”

“그렇습니다. 야포장과 돌격장 야전장 등 수급을 잃으니 정신 줄 놓고 흩어진 것입니다.”

백령 권승경이 후에 쓴 ‘만취당(권율의 호) 둔갑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한문 원문을 권씨종친회에서 한글로 옮긴 것임).

-왜적은 재 위를 향해 올라온다. 마루턱 몇 십보 지점에 돌격명령은 나렸다. 한참 열전 도중에 선봉장 황진이 적탄에 맞아 물러선다. 위하 장병도 따라서 후퇴하기 시작이다. 이때에 충장공(권율)은 칼을 빼어들어 몇 놈 (도망가는)후퇴병을 입참하고, 최전방에서 추상같은 군령으로 독전하시었다. 사기는 회복되어 적군이 함성을 높이고 진격하는데 한 사람이 넉넉 백명을 당하는 형세다. 왜적은 당황하여 뒤로 돌아선다. 패주하는 놈들을 추격하여 삼십리 산골에 적시는 (피가)늘비하였다. 적의 총대장 小早隆川景은 황혼의 산길에 갈 바를 잃고 으슥한 영천골로 들었다. 미리 복병해있던 권승경 부대가 나서니 적장은 혼비백산하여 퇴로구멍을 찾았다. 이 싸움에서 경상도를 점거하고 있던 왜군 주력부대인 융경 부대는 참패당하고, 다시는 호남을 엿보지 못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물산이 제일 풍부한 호남지방을 보유했음으로 전시 군량·군자를 끊임없이 공급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육군의 최초의 승전보였다(이하 생략).

배티재는 금산과 전주성을 재로 차단한 천험준령(天險峻嶺)이며 영남 호남간의 큰 관문이다. 임진년 7월에 충장공께서 왜적 4만을 섬멸한 곳으로 육전에 최초 승전한 곳이니 패주 왜적은 근처 영정골로 들엇다가 백령공 복병부대를 만나 적장 융경 이하 큰 피를 흘렸으니 지금도 배티재 아래 시내를 피내(血川)라고 부른다. 통쾌한 승전을 하고서 의주에 파천한 선조대왕께 첩보를 올리는데 지모출중한 정금남(鄭錦南)이 그 사명을 이루었다. 만산평야 왜적 소굴을 뚫고서 어떻게 첩보를 휴대하고 의주 천리를 갔겠는가. 정금남은 첩보 쓴 종이를 줄줄이 오려서 신을 삼았다. 왜적이 볼 적에는 신고, 안볼 적에는 꿰어차고 유유히 난관을 돌파하였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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