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13>-제7장 비겁한 군주

황윤길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 도요토미의 꼴은 김 부사 지적대로 볼품없고 시시합니다. 성격도 괴팍하고 행동도 팔랑개비처럼 가볍고 중구난방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만큼 힘이 있으니 나온 행동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그렇게 지 멋대로 나오지 못하지요. 강자는 무슨 짓을 해도 통용되니까요. 나라의 중대사를 관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온 바, 저는 그의 흉악한 내면을 보았나이다. 그는 탐욕으로 가득차 있사옵니다. 지모가 있사옵나이다.”

“황 정사, 그걸 말이라고 하오? 인간은 생긴대로 노는 것이 아니오. 여우 새끼 꼴은 여우처럼 사는 거고, 호상은 호랑이처럼 사는 것이오. 그는 해안가에서 조개나 개펄을 주워먹다가 비르적거리는 도적에 지나지 않소. 그런 자를 성상께 장황하게 아뢰어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여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단 말인가. 당장 거두시오!”

성질 급한 김성일이 얼굴이 빨개진 모습으로 호통쳤다. 그 말은 백번 맞았다. 유언비어가 얼마나 민심을 왜곡시키는가. 김성일의 질책을 듣고 왕도 황윤길이 때려죽이도록 미웠다. 통신사 정사로 보냈더니 부사보다 못하고, 보고 온 것이 고작 흉심이 어떻고, 지략이 어떻다고? 썩은 동태 눈깔이 아니라면 저런 진맥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도 감히 왕의 안전에서 다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같잖기도 했다. 하긴 그런 다투는 모습도 구경할만해서 두 사람의 언쟁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김 부사,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보건대 관백(도요토미)은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고, 음험한 사람이요. 아들 하나를 얻고자 힘좋은 부하를 자기 애첩 방에 넣어서 아들을 얻은 자 올시다. 무슨 일이든지 얻고자 하면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올시다.”

“그러니까 상놈의 새끼 아니오! 그런 상놈이 일을 벌인다면 뭘 벌인다는 거요?”

“아니올시다. 흉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목적 달성을 위해 무슨 짓도 다 한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그 자가 상놈의 새끼라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런 자의 흉심은 상놈일수록 음험하게 내장시키고 있는 법이오.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으로 우리에게 길을 내주라 하면서 조선을 병탐하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오이다. 사나운 발톱을 감추고 있소이다. 상감마마, 저의 말씀을 새겨 들어주시옵소서.”

“정사의 눈이 왜 그리 협량한가. 김성일 부사의 말이 그게 아니라고 하잖는가. 김 부사는 민심이 흐트러지고, 불안하니 쓸데없는 유언비어나 흑색선전은 금하자는 것이 아닌가.”

“전하, 김 부사의 말씀이 옳은 것 같사옵니다. 민심을 다잡아야 할 때이옵니다.”

영의정 유성룡이었다. 그는 당쟁에서 무색무취였으나 현실을 따르는, 굳이 말한다면 기회주의자였다. 당시의 국가 운영은 당파에 따라서 결정되었으니, 예를 들어 서인의 의견이 옳아도 동인이라면 비틀어버리고, 마찬가지로 동인의 의견이 옳아도 서인이 다른 구실로 밟아버렸다. 그러니 가치는 증발하고 세력다툼만이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었다.

유성룡도 힘이 센 동인 편에 선 것이고, 그래서 김성일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사실 이런 정서는 선조가 부추긴 측면이 컸다. 그는 출신 성분상 왕이 될 군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애초에 자격지심, 요즘 말로는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었다. 늘 불안하게 국정을 이끌어가는데, 그러다 보니 그 자신 기회주의자의 표본이 된 셈이었다. 옳은 것도 틀어버리는 세력이 힘이 있으면 거기에 힘을 보태고 함께 얹혀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왕이 의주까지 쫓겨온 것도 황윤길의 말을 외면한 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김성일이 한없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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