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삶을 바꾸는 첫 일자리 시장 ‘이용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행정 고위직 ‘승승장구’

지방정부 수장 3수 도전, 천신만고 끝에 성공

“지역발전으로 보답하겠다”며 결초보은 자세

전남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에서 돈 없고, 빽 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용섭 민선 7기 광주광역시장.
지난달 치러진 6·13지방선거에서 세 차례 도전 끝에 광주 시민의 선택을 받은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은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에 지역 발전으로 보답하겠다”며 결초보은을 거듭 약속했다. 이용섭 시장은 당선 당시 “‘정의롭고 풍요로운 광주’를 기치로 정신적인 가치와 물질적 풍요가 함께 하는 행복한 광주시대를 열겠다”고 시정운영의 기본방향을 설명했다. 민선 7기 최우선 과제로는 ‘일자리 창출’을 꼽았고 광주형 일자리모델을 성공시켜 그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해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 성공을 이끌겠다는 포부도 덧붙였다.

오직 광주의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밝힌 이 시장은 어릴 적부터 공직자가 꿈이었다. 이 시장은 광주에서 30㎞, 차로 20∼30분 거리인 전남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에서 돈 없고, 빽 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남 함평 학다리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우들과 찍은 사진.
1970년 전남대에 입학, 2학년 때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해 4학년 때 합격했다. 전남대에서 재학 중 고시 합격은 처음이었다.

이 시장이 고시 합격을 목표로 두게 된 이유는 “농사꾼 집안에서 자랐는데 벼베기 철에 막걸리를 안 사가면 주조장 사장이 세무서에 밀주신고를 해서 벌과금을 내 난리가 나곤 했죠. 그걸 보며 ‘왜 공직자들은 선하고 가슴 따뜻한 농부들을 슬프게 하는 걸까’. 그런 고민 끝에 비위 공무원들을 혼내려고 고시를 준비했었죠”라고 회상한 바 있다.

이용섭 시장은 1970년 전남대에 입학, 2학년 때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해 4학년 때 합격했다.
하지만 공직은 생각만큼 순탄치 만은 않았다. 시골 고등학교(함평 학다리고), 지방대(전남대), 전라도 출신이라는, 3가지 꼬리표가 더 없는 악조건이 됐다. 이 시기 이 시장은 부단한 자기 계발로 핸디캡을 딛고 고시에서 최상위권에 든 그는 소위 ‘잘 나가는’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로 첫 발령난 후 승진을 거듭한 끝에 화려한 스펙을 쌓기 시작했다.

DJ정부 관세청장을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 국세청장, 청와대 혁신수석비서관, 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장관급인 초대 일자리위 부위원장을 지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에서 두 번의 청장, 두 번의 장관 등을 역임했다.

행정 고위직에서 곧바로 정계로 진출해서도 그의 승승장구는 멈추지 않았지만 지방행정 수장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2년 만에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에서 광주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패했다.

이어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재선에 성공한 뒤 2014년 다시 광주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김한길 대표가 안철수의 새정치신당과 합당해 신당을 창당한 뒤 윤장현 후보를 전략공천했고 이에 반발, 탈당과 국회의원 사퇴라는 배수진까지 치고 시장 선거에 뛰어 들었지만 또 다시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2016년 총선에서도 국민의당 녹색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는 등 사실상 정계 은퇴를 고민했어야 했다.

지난해 5월 19대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후보의 비상경제대책단장과 경제특보라는 중책을 맡았고 문재인 정부 일자리위원회 초대 부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 번째 광주시장에 도전한 그는 드디어 광주시민의 선택을 받아 민선 7기 광주시장으로 당선됐다.

이용섭 시장은 “‘떠나는 광주’에서 ‘사람, 돈, 기업이 몰려드는 200만 광주 르네상스 시대’를 반드시 열어 광주를 대한민국의 중심도시로 우뚝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노정훈 기자 hun7334@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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