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24>-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정충신은 행재소로부터 멀지 않은 통군정(統軍亭)의 루(樓)에 올랐다. 멀리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압록강물을 보자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으로 가는 북방 관문 역할을 하는 국경지대인데, 이런 위치 특성상 여몽전쟁 등 북방민족이 조선을 침탈할 때는 가장 먼저 점령당하는 수난을 겪었던 땅이다. 의주는 북방 수비의 요충지이지만, 반면에 일찍부터 대륙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기질이 거칠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주민들 성격은 괄괄했으며, 대륙의 여러 부족들과 맞서 싸웠고, 부당한 조정의 차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의주성의 난(고려 고종8년), 위화도 회군 반란(1388년), 훗날 홍경래난(1811년)의 근거지가 의주였다.

의주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津)과 산에 성을 많이 축조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선조를 위해 축성된 성처럼 보였다. 그는 고려가 쌓은 성들의 혜택으로 지금 몸을 상하지 않고 온전히 옥체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의주 지역은 고려말 해군 제독을 지낸 정지(鄭地) 장군과도 인연이 닿은 곳이었다. 그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를 지킨 여말(麗末)의 명장이었다. 정지는 안주도원수로 복무 중, 최영 팔도도통사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에 합류해 위화도에 출정했다. 최영 팔도도통사 밑에는 이성계가 우군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중 정지는 이성계와 가깝게 지냈다. 이성계는 정지보다 열두 살이 많았지만 동지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정지는 어느날 이성계로부터 의주 땅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기가 막힌 농주가 있지 않갔슴메? 우리 가서 진탕 마시고 오자우.”

두 사람은 군선을 타고 의주 땅으로 나와 주막을 찾았다. 농주에 대취하자 이성계가 비분강개에 젖었다.

“내 무훈을 최 도통사가 독차지한단 말이다.”

이성계의 용맹은 뛰어나고 적을 물리친 무훈이 빛났으나 오르지 못할 사다리가 있었다.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변방 지역 출신인 이성계는 공을 세웠더라도 권문세족인 최영의 그늘에 늘 가렸다.

“홍수가 나는 이 여름에 요동정벌이라니 말이 되냐?”

이성계는 이렇게 불만부터 터뜨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것이오?”

“너는 내 고향 사람 아닌가. 나의 고향은 본래 전주야. 정 장군은 나주가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음메?”

“맞습니다. 하지만 이 우군도통사의 고향이 전주라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함북 영흥이 고향 아닙니까?”

“곡절이 있지.”

그리고 이성계가 길게 설명했다.

고려의 국가 체제는 왕조국가지만 내면적으로는 지방 호족이 권력을 나눠갖는 형태였다. 조정에서 임명한 감사·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지방 호족과 긴장관계를 갖기도 하고 공생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지방 호족들은 수백 명의 사병까지 두고 있었으니 군벌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래서 독립적인 작은 국가 단위인 셈이었다.

전주이씨 시조는 하대 신라기 전주의 대호족이었던 이한이고, 그 후손들은 대대로 부와 권세를 이어받아 드넓은 전주평야와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도 호남제일의 호족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전주 감영(監營)의 감사와 충돌했다. 감사는 자기 손으로는 권세가 대단한 이안사 단죄가 어렵다고 보고 왕실에 고발했고, 조정은 이안사를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전주로 급파했다.

이 첩보를 입수한 이안사는 수십 척의 배를 변산반도 앞바다에 대고 재산과 노비와 사병들을 싣고 남해를 거쳐 동해를 거슬러 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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