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27>-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할아버지, 그런 백성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불쌍하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으니 불행이지. 조선은 알다시피 역사상 최악의 노비제 나라다. 천민은 벌레 취급되었다. 노비는 동방이나 서방을 가리지 않고 있었으되, 여타의 나라는 전쟁 포로나 범죄자, 속국에서 잡아오는 것이 일반적 조달 방법이었다. 피부색깔이 다른 이민족이나 침략해서 끌고 온 외인종이 노비의 주종인데, 조선만은 자국의 백성을 상대로 노비로 삼았다. 조선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이득을 취한 적이라곤 없었으니 나라 안에서 노비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상층 구조가 광범위하고 단단해서 노비 수요가 그만큼 많이 요구되었다. 기득권 세력은 하늘에 닿을 만큼 권세를 누리는지라 많은 노비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래서 백성의 반절이 노비 신세였다. 정적을 때려잡아서 죽이고, 그 식구들을 종으로 삼았고, 훔치는 자, 사기친 자, 게으름뱅이도 잡아서 노비로 만들고, 노비 종자를 더 퍼뜨려서 종으로 삼았다. 조선은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가 되었다. 너도 뼈대있는 집안의 후예였지만, 네 아비가 여러 곡절을 거친 끝에 반역으로 몰렸던 집안의 네 어미를 사랑하여 취하다 보니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너희들도 천출 취급을 받았느니라. 설혹 어미가 천하다고 해서 자식이 천출이 되어야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해놓으니 어느 누가 나라에 충성심을 갖겠느냐. 말은 효! 충성! 하고 복창한다고 하지만, 마음 속으로 승복했겠느냐. 단일전선 단일대오로 뭉치는 것이 전선의 기본 전법인 법, 나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갈갈이 찢어놓았으니 국가동력을 찾을 길이 없었도다.

어느날 아버지 정윤이 통탄하는 것을 정충신이 들었다.

“어느 고을에 세폐(稅弊)로 견디다 못한 백성이 도망가고, 또 어느때는 흉년이 들어서 낟알을 생산하지 못한 자가 유리개걸 하는 신세가 되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데, 자연 천대를 받게 되었다. 이중에는 어리고 성품이 순한 아이, 어여쁜 소녀들도 있었으니 세도있는 집에서 잡아두고 종으로 부리고, 첩으로 삼고, 그러지 못할 형세면 팔아먹었다. 또 어떤 고약한 놈이 도박해서 돈잃고 내놓을 것이 없으니 처자식을 팔아먹기도 하고, 이를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파는 장사치도 나왔다. 너의 어미도 양가의 자제였으나 난을 만나 관아에 곡식 빼앗기고 소를 잃으니 아비가 억울해서 대들다가 맞아죽고, 그 가족들이 쫓기는 빈한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 어미를 어찌 천인으로 여기고 구박할 것인가. 하늘이 내린 생명이거늘 거기에 무슨 차별이 있고, 상하가 있느냐. 나는 너의 어미를 어떤 누구보다 나의 값진 보배로 받아들인다. 나의 핏줄을 이어주었으니 내 생명의 모체로다. 어미가 바로 나의 하늘인 것이다.”

그런 아비 탓에 정충신 역시 어머니가 위대할 뿐, 다른 어떤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정윤은 어느날 또 이렇게 말했다.

“상전은 무슨 재주가 많고 공이 많아서 상전이 되었는가. 종은 무슨 죄가 많고 지혜가 없어서 종이 되었는가. 아니다. 못된 세상이 그렇게 꾸몄을 뿐이다. 글을 아는 자들이 불공평하게 틀을 만들어서 이익을 취했다. 배우면 세상을 바꾸고 스스로 변화해야 하는데 자기들 이익 취하느라고 백성들은 그 자리에 있으라 하고, 가두고 묶어버렸다. 그들은 더욱 수구화 되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