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29>-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정지 장군과의 문답은 사실은 정충신 자신의 평소 고민이 정지 할아버지라는 창을 통해 나온 얘기들이었다. 그러니 자무자답인 셈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은 이어졌다.

-조선은 백성을 미천하게 만드는 나라 같도다. 길을 넓게 내지 않으니 운반수단을 보상이나 부상의 지게에 의존한다. 인간을 짐승으로 여긴 탓이다. 길을 내지 않으니 큰 우마차가 다니지 못하고, 문물이 차단되고, 문명이 소통될 리 없다. 골짜기에 박혀 하루 먹고 하루 살라는 뜻이니, 그냥 고여 있으라는 것이다. 그냥 썩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썩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 갇혀 사는 은둔국이 어떻게 발전하겠느냐. 빌어먹을 세상이로다…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욕하시면 누워침뱉기 아닌가요?”

-천상에서 내려다 보니 그렇게 빌어먹을 세상으로 보인다. 조선이란 나라, 여성 차별 또한 가혹하다. 자기 태어난 모태를 이렇게 짓밟고 병신 만드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자궁이라는 절대적 본향을 우러르지 않은 나라는 절대적으로 망한다.

“할아버지, 남녀는 유별(有別)해야 한다면서요?

-왜 유별이고, 남녀칠세부동석이냐. 무엇 때문에? 고려대만 해도 이 모양까지는 아니었다. 여권 상위는 아니더라도 남녀동등권이 행사되었다. 고려조에는 남편과 사별하면 조선조 때처럼 폭삭 홀로 늙어죽게 만들어서 열녀비 하나 세워주는 것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치부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도록 허용했도다. 그 기나긴 독수공방으로 고독을 씹으며 슬프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새 남자 만나서 새 인생 일구도록 하였도다. 유산도 자녀 균분상속으로 여자들도 똑같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느니라. 외조나 외고조 등 모계 조상의 덕택에 음서(蔭敍)를 받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계보다 모계 조상이 우러를만한 때에는 모계를 선대 계보로 삼기도 했도다. 네가 사는 조선조라면 가능하겠느냐.

“그러면 그때가 더 개명된 세상입니까. 역사가 후퇴해버렸습니까?

-인본을 중시하지 않는 예법은 허구다. 고려대는 가능한 한 본래 지닌 인간적 품성대로 살았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모계친화적인 생활모습이다. 어미 닭을 따르는 병아리같이 자연스럽게… 인본에 의하지 않고, 그들만의 틀을 짜서 제도로 묶고, 예법으로 가두니 나라의 창발적 동력은 떨어졌다.

“우리 뇌 속에는 창조라는 말이 없잖아요. 예전 것 달달 외우면 과거 합격해 출세하잖아요.”

-그래도 백성이 꿈틀거린 곳이 있었나니, 그곳이 바로 의주 땅이니라. 의로운 땅이라 하여 붙여진 고을 이름이니, 여기서 배움을 익히도록 하여라. 왕실의 허한 모습도 똑똑히 지켜보거라. 왜 나라는 웃대가리, 지도층이 썩지 말아야 하는지를 직접 보고 살펴라. 먼 훗날 가질 너의 웅대한 포부를 펼치려면 어지러운 것도 보기로 삼아야 하느니라.

“다른 생각을 품으면 잡아 죽이잖아요. 그래서 순응하며 사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고 하잖아요.

-쯧쯧, 속좁은 생각이라고는… 나이 어릴 때는 이상주의를 꿈꾸는 법이다. 하긴 네 나이에 왕이 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고 장계를 품고 이천오백 리 길을 목숨을 걸고 왔으니 장하다. 그것으로도 너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것은 내가 바다를 굳건히 지킨 정신과도 일치하도다. 너는 장차 머리 큰 군인이 될 것인즉, 명심하거라. 한 사람이라도 나라의 방벽이 되겠다고 나서면 무너져도 곧 복원력이 생기느니, 의연히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가거라.

할아버지 형상은 알 수 없는데 할아버지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정충신이 두 주먹을 쥐고 물 건너 위화도를 바라보는데, 압록강물은 큰 짐승의 무리처럼 꿈틀거리며 도저하게 흐르고 있었다. 씩씩한 기상이 저절로 흉중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이때 이항복이 행재소에서 물러나와 루 쪽으로 황급히 걸어오며 소리쳤다.

“정충신, 거기서 뭘하느냐. 어서 나를 따르라. 성상께서 울고 계시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다른 신료들이 계시잖습니까요.”

“그들은 모두 분조로 떠났다. 또 그들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정충신이 어전에 들어서자 아닌게 아니라 왕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물을 건너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과연 과인이 여기 남아서 안전할 것이냐?”

그는 몸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무슨 발작증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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