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39> 9장 다시 광주

이항복의 사랑방에 정충신이 들어와 앉았다. 이항복이 무릎 꿇고 앉은 정충신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체격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딱 벌어진 어깨하며, 근육질로 다져진 팔뚝과 허벅지, 무예를 많이 닦아서인지 나무랄 데없는 몸을 갖고 있다. 호기심 어린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어떤 무엇에도 굽힘이 없는 태도가 소년다운 패기가 흘러넘쳐 보인다. 그래서 그의 장인 어른도 이 소년을 예사로 보지 않았던 것인가. 그랬기에 머나먼 이천오백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라고 장계를 내주었을 것이다.

“꼭 가려고 하느냐?”

“가야 합니다.”

“왜 가려고 하는고?”

“목사 어르신을 뵙고 귀환보고를 해야지요. 공무를 수행했으면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합지요. 명령을 받고 수행한 행위에 대해 최초의 목적에 부합되었는가를 확인하고, 행위의 원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얻었나 살펴보고 보고하는 것은 부하가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오호, 그래?”

이항복은 속으로 뿌듯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더 떠보았다.

“그 말은 맞다만 주상전하께옵서도 너와 대화를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느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처음과 끝이 명확해야 하옵니다.”

“행궁의 주상전하께서는 지금 매우 쓸쓸하고 외로우시다. 네가 와서 그나마 위안이 되셨느니라. 나날이 붕어하는 마음으로 사셨는데 말이다....”

“붕어라니요? 잉어보다 작은 붕어 말씀이옵니까?”

이항복은 재치와 해학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충신이 진짜 문자를 몰라서 묻는 줄은 모르고, 이항복이 웃으며 말했다.

“붕어란 임금님이 흥거하신다는 뜻이다.”

“흥거는 또 뭡니까. 흥겹다는 도성 말이옵니까?”

“알아두거라. 왕의 죽음을 훙(薨)이라고도 한다. 훙거(薨去)하시다, 안가(晏駕)하시다, 선어(仙馭)하시다고 하느니라. 지체가 높은 분들의 죽음에는 졸거(卒去), 소천(召天), 사거(死去) 따위가 있느니라. 잘 외워두어라. 나중 문과나 무과 시험에도 종종 나오느니라.”

정충신은 어이가 없었다. 꼭 말장난하는 것 같다.

“그것이 국사에 무슨 의미가 있사옵니까. 국가발전 방향이 무엇인가, 하다못해 장례 개선법이 무엇인가, 국가조직 운영의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묻는 것이 바른 시험 아닙니까? 윗분이 죽으면 돌아가셨다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별에별 용어로 실력을 재니 매양 사는 처지가 그 모양 아닌가요?”

“맹랑한 녀석이로군. 묻는 말에 대답하렸다. 그럼 아랫 사람이 죽었다면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냥 숨졌다 하면 안되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지체높은 이항복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법과 법도로 살아오니 우리가 예법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느니라. 그런 것을 지키는 것도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이다.”

구차스러운 것이라도 임금에 충성하는 것이라면 통용되고 묵인된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나라의 기틀로 삼기에는 뭔가 어설퍼 보인다. 실질로 해야 할 것을 쓸모없는 데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정충신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항복이 말했다.

“너의 생각이 독툭하다고 보긴 한다마는 질서 속에 사는 것이 세상의 이치고, 그것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모난 돌이 징맞는다. 하지만 너를 보니 내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구나.”

“어르신이 어떠셨는데요?”

이항복이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것을 알려면 나와 함께 지내야 하느니라. 여기 남거라. 배움이 있어야 하느니라. 너에게는 지금이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가장 좋은 학창기다.”

“그러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권율 사또 어르신께 복귀 보고를 하고, 부모님과도 이별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목사 어르신은 제 수령이시고, 수령의 명을 받잡고 의주에 왔으니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하옵니다. 그러지 않고 눌러앉아버리면 의주차사란 말을 듣기가 똑 맞지요. 그리고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사옵니다.”

“누구냐?”

“여자이옵니다.”

“여자?”

이항복이 놀라는 눈으로 정충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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