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1. 전라도 진상품과 그 아픈 속사정

백성의 눈물과 고통으로 바쳐지던 맛있고 귀한 것들

<進上品)>

진상품은 祝日과 紀念日에 임금에 바쳐지던 정표

나중에 백성고혈 빨아내는 강제적 세금으로 변해

전남지역 355 種 토산품 중 진상품은 56개 종류

생산 안 되는 것도 진상토록 강요…朝鮮亡國 원인
 

진상품 굴비. 관리들은 백성들을 들볶아 많은 토산품(진상품)을 내놓도록 했지만, 조정에는 이를 적게 보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그러다 보니 공납을 빌미로 한 탐관오리들의 무차별 착취와 수탈은 여전히 계속됐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고 조선은 망해갔다. 백성들의 신세는 엮인 굴비 같았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와 농수산물생산·가공업체들이 자신들의 고장이나 업체에서 출하되고 있는 지역 특산품에 대한 우수함을 소개하면서 ‘진상품(進上品)이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진상(進上)은 지방관리들이 토산품이나 특산물, 귀한 것들을 충성의 표시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진상품은 지방 관리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귀한 물품을 뜻한다.

지금 많은 농수산물 업체들이 자신들이 생산하고 있는 품목에 대해 ‘과거에 진상품이었다’고 홍보하는 것은 ‘그만큼 맛이 좋고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소비자들 역시 ‘진상품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절로 솔깃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임금에게 바쳐졌던 것이니, 참 좋은 물건이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진상품’이라는 단어가 주는 효과다.

진상은 당초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나라의 기념일(節日)과 경사(慶事)에 임금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실시했던 소박한 행위(禮獻)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강제적인 세납(稅納)으로 바뀌면서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내는 무자비한 제도가 되고 말았다. 지방관리들은 할당된 양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짰다. 당연히 협잡과 폭력이 난무했다.

요즈음 백화점이나 음식점에서 ‘갑 질을 떠는 손님’을 ‘진상손님’ 혹은 줄여서 ‘진상’이라 하는 것은 이 ‘進上’(진상)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손님은 왕’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종업원들에게 온갖 무례한 행위와 폭언을 서슴지 않는데서 비롯됐다. 백성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여겨 온갖 부정과 협박을 저질렀던 관리들의 행태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진상’이다.

진상은 당초 마음의 정표였으나 후에 강제적인 세금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공물(貢物)은 지방 관리들이 궁중에 내는 공식적인 세금이었다. 궁궐에 쓰이는 물자와 조정대신들의 삯을 충당하기 위해 바쳐지는 것이 공물이었다. 지방 관리들은 공물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마련해야할 진상품 부담을 백성들에게 떠넘겼다. 백성들만 진상품과 공물을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어갔다.

진상품은 임금에게 올리는 먹거리와 궁중의 제향이나 외국사신 접대 등에 쓰이는 지역토산품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이 한 달에 한 번씩 진상품을 직접 조정에 바쳤다. 진상품의 양과 질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정도로 판단됐다. 이에 따라 공물의 피해보다 진상의 폐해가 심해졌다.

중앙의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司寺)·사재감(司宰監)·사포서(司圃署)·의영고(義盈庫) 등 진상품을 수납하는 중앙의 각 관서는 이것들을 취합해 날마다 궁중에 조달했다. 왕실의 소비 규모가 커지면서 궁궐에서 요구하는 진상품의 양도 크게 늘어났다. 조정에서 가까운 경기도의 경우 매일처럼 진상품을 올려야할 정도가 됐다.

진상품은 철에 따라 새로 나오는 토산품(먹거리)을 올리는 것이기에 운반과 보관에 어려움이 많았다. 상하거나 썩은 것이 나오면 관리들은 이를 백성들에게 다시 부담시켰다. 상할 것을 대비해 더 많은 양을 요구하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배달사고’도 흔했다. 중간에서 진상품을 빼먹는 관리들의 협잡과 부정이 심해질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그만큼 커져갔다.

■조세제도의 변화

한반도에 나라가 세워지면서 왕들은 백성들에게 일정량의 세금을 부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 시대에 어느 정도의 세금이 어떤 형태로 매겨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율령제도를 본 따 시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 당나라는 조(租)용(庸)조(調)라고 하는 조세체계를 사용했는데 한반도의 국가들이 이를 그대로 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租)용(庸)조(調)를 살펴보면, 조는 토지에 세금을 부과해 곡물을 징수하는 것이다. 용은 사람에게 부과하여 역역(力役) 또는 대납물을 징수하는 것이다. 조는 각 호(戶)에 부과해 토산품을 징수하는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인 949년(정종 4년)에 각 주현의 세공(稅貢)을 정했으나 시행과정에서 폐단이 많아 빈번한 개편이 있었다.

메생이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사용했으나 그 폐단이 커 1401년(태종1)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해 공물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을 공물로 내라고 하거나 공물을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방납(防納:代納)의 폐단이 계속돼 국가수입은 줄어든 반면 백성들의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이에 세종은 이를 근절하기 위해 공부상정안(貢賦詳定安)을 마련했다. 연산군 때는 공부상정청(貢賦詳定廳)을 설치해 공물을 재배정했으나 방납의 폐해는 오히려 커졌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실행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악법(惡法)이 되는 이치였다. 관리들은 백성들을 들볶아 많은 토산품을 내놓도록 했지만, 조정에는 이를 적게 보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은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는 내용의 수미법(收米法)도입을 주장했다. 특히 이이는 1569년(선조 2)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통해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했으나 실시되지는 못했다.

전복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국가수입이 감소되자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됐다. 대동법에 따라 공물은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됐다. 일률적으로 각 농가(호)에 부과되던 세금도 논과 밭의 넓이에 따라 매겨졌다. 논밭이 없거나 소작을 하는 영세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양에서 지방 특산품을 살 수 있는 상거래가 없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쓰이는 특산품 공납은 계속됐다. 이에 각종 세금과 병역세(軍布) 등은 미곡으로 냈으나 특산품은 여전히 각 고을에 배정돼(貢膳定例) 한양으로 실려 갔다. 그러다보니 공납을 빌미로 한 탐관오리들의 무차별 착취와 수탈은 여전히 계속됐다.

■<고려도경>과 전남지역 토산품 관련 기록

전남은 서해와 남해 두 바다를 끼고 있으며 영산강과 섬진강 등 큰 강이 많아 예로부터 농수산물의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넓은 평야를 지니고 있어 한반도에서 으뜸가는 곡창지대다. 큰 산들과 섬에서는 진기한 약재와 귀한 수산물들이 풍부하게 생산됐다. 먹거리가 풍부한 탓에 호남은 항상 쟁탈의 대상이면서 또한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책 <택리지>(擇里志)에서 ‘전라도는 땅이 기름지고 서남쪽은 바다에 임하여 생선, 소금, 벼, 실, 솜, 모시, 닥, 대나무, 귤, 유자가 생산된다’고 기술했다. 후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은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호남을 지배하는 자만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토산품에 대한 기록은 중국 측의 고대기록인 <제민요술>(齊民要術)이나 1124년 송나라의 서긍이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등장한다. 서긍은 1123년 송의 사신 로윤적을 따라 고려의 수도 개성에 1개월간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 중 송나라와 다른 것을 40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 것이 <고려도경>이다

이 <고려도경>에는 나주와 조공품과 관련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대목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삼의 이로움, 소나 양을 축산하기에 좋고 여러 가지 해물과 아름다움이 있다. 3州에는 큰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나주도:지금의 전라도를 의미하는 듯)에도 있으나 3주의 풍부함만 못하다’

‘관에서 매일 내놓은 나물에 또한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땅이 잘 자라 복령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이 나며 나주에서는 백부자, 황칠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이다’

(김정호 著 <조선시대의 전남진상품>中 발췌)

■전남지역의 생산물과 진상품

지금의 시군 단위인, 군현별로 지역토산물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역의 토산물과 약재·진공물이 토의(土宜)·토산(土産)·토공(土貢)·약재(藥材) 등으로 나누어 기록돼 있다. 토의는 그 지역의 기후풍토에 가장 알맞은 산물을, 토산은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나는 산물을, 그리고 토공은 지역산물이면서 임금님께 바치는(進貢)하는 산물을 뜻한다.

목화

○토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조선전기 전남의 주요 육지 산물은 20가지로 다음과 같다.

‘오곡, 뽕나무, 삼, 목화, 닥나무, 대나무, 왕골, 모시, 비자, 유자, 석류, 감, 밤, 배, 귤, 버섯, 생강, 옻칠, 꿀, 철’

장흥표고버섯

○토공

전남지역에서 나는 토산(土産) 중 임금에게 바쳐졌던 토공(土貢)은 모두 56개 종류로 다음과 같다.

‘표범가죽, 너구리 가죽, 여우가죽, 담비가죽, 족제비털, 표범꼬리, 등나무상자, 목화, 자리, 작설차, 생강, 죽순(말린 죽순), 대추, 감, 배, 석류, 비자, 물개가죽, 옻칠, 녹용, 꿀, 황랍, 표고버섯, 전복, 홍합(말린 홍합), 분곽, 상곽, 석이버섯, 자초, 가위톱, 수포석, 사슴뿔, 숭어, 범 가죽(호랑이가죽), 상어, 부레, 검은대, 밀랍, 가뢰, 차, 심황. 호도, 느타리, 미역, 유자, 붉은 큰새우, 대껍질방석, 모과, 생모시, 홍화, 귤, 왕대, 바닷대, 울금잎, 매화, 인삼.

호두

이중 표범가죽과 표범꼬리, 호랑이 가죽 등이 토산품에 끼어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신기할 뿐, 조선시대 이 땅의 산에는 표범과 호랑이들이 많았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휘보>에 따르면 일제가 일본인 사냥꾼 및 조선인 포수 3천97명과 조선인 몰이꾼 4만4천460명을 동원해 1915년과 1916년 2년 동안 잡은 호랑이는 24마리,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 늑대 228마리, 멧돼지 2천664마리, 사슴 186마리에 달한다.

일제는 계속해서 맹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조선 호랑이와 표범 사냥에 나섰다. 총독부 직원이었던 요시다 유치로(吉田雄太郞)의 기록에 따르면 1919년부터 1924년까지 6년 동안 조선에서 잡은 호랑이는 65마리, 표범은 385마리였다. 이 기간 동안 전남에서 잡힌 호랑이는 6마리, 표범은 16마리였다. 전남지역에는 맹수들이 많이 살았으며 호랑이와 표범 가죽은 궁중에서 선호하는 진상품이었다.

참게 섬진강

○약재

조선전기 전남지역에서는 모두 30여 종류의 약재가 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연밥, 매실(검은 매실, 연 매실), 맥문동, 패랭이, 꽃 이삭, 도아조 기름, 잉어쓸개, 녹용, 난향, 천문동, 적전자, 인삼, 수포석, 오징어 뼈, 방풍(방풍나무뿌리), 목단피, 자주연꽃, 하국, 사슴뿔, 자연동, 모과, 바다나물뿌리, 호본, 말린 생강, 매화(매화열매), 차, 당귀, 검산풀뿌리, 암눈비앗씨, 애기풀, 방풍, 계소, 매실, 녹각상(녹각교), 심황, 복령(백복령), 연꽃술, 가위톱, 매화, 생지황, 가뢰, 백작약, 구리대뿌리, 고슴도치가죽, 결명자, 나팔꽃씨, 흑변두, 수뤼나물, 바곳(흰바곳), 두룹뿌리, 족도리풀뿌리’

무등산수박

○해산물

조선전기 전남지역에서 어획됐던 고기와 해산물은 다음과 같다.

-어류:절어, 숭어, 조기, 상어, 은어, 응어,붕어, 넙치, 준치, 밴댕이, 황어, 민어, 병어, 농어, 보개어(15종)

-패조류:전복, 홍합, 굴, 맛, 조개(5종)

-해조류: 미역, 감태, 가사리, 김(4종)

-기타수산물: 오징어, 낙지, 새우, 해삼, 게, 물개, 문어, 복쟁이(8종)

전복양식장 완도 보길도

이처럼 조선 전기에 전남지역에서 생산됐던 토산물은 ▲육지 주요산물이 20개 ▲토산인 토공 56개 ▲약재 30개 ▲해산물 32개 종류 등 모두 138개 종류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217종이 추가돼 모두 355종의 토산물이 생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농법과 어업의 발달, 인구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820년께 각 고을에 배정된 특산품(貢膳定例)을 정리해놓은 <호남공선정례부편>(湖南貢膳定例附編)에 의거해 품목별 특산지를 구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석류: 능주, 광주, 장흥

·유자: 흥양(고흥), 강진, 순천

·홍시: 남평, 창평

·곶감: 능주, 동복

·쭈그러진 감: 담양, 장성

·작설차: 광주

·생죽순(즙): 담양, 구례, 곡성

·거핵(솜):광주, 옥과, 동복

·백포(명주베): 무안, 함평, 영광

·표고버섯: 강진, 고흥, 순천

·꿀: 장성, 능주

·후백지(두꺼운 종이): 담양, 장성, 광주

·초석(草席:자리): 옥과

·주유지(注油紙:기름종이): 담양, 장성, 구례

·생은어와 염(鹽)은어: 곡성, 옥과, 구례, 광양, 동복

·말린 오징어: 나주, 영광, 함평, 무안

·조기: 나주, 영광, 함평, 무안

·굴비: 나주, 영광, 함평, 무안

·전복: 영암, 진도, 고흥

·생전복: 순천, 영암, 고흥

·장인복: 순천, 영암, 장흥, 고흥

·김: 강진, 고흥

·미역: 장흥, 해남

·올미역: 장흥, 광양, 강진, 고흥

·말린 숭어: 광양, 보성, 진도, 나주

·숭어알: 나주

왕골 돗자리
무안 해제 도리포 숭어 잡이
김발

여러 가지 문헌을 참고해 봤을 때 조선시대 각 고을의 명산품은 대략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황칠(해남, 강진)·안식향(영암땅 완도)·뱅어·광어(영광)·동백기름(해남)·목기(구례)·대발(담양)·화문석(보성)·왕골자리(함평,옥과)·인삼(영암, 강진, 조선 초기 화순, 동복, 진도, 순천)·부추(나주, 장흥)·굴비(나주, 함평, 무안)·영지버섯(구례, 광양)·감초(나주, 해남)·오미자(구례)·복령(영암, 곡성)·생강(나주, 영암, 장흥, 순천, 장성, 영광)·마포(곡성, 보성, 순천)·대추(광주, 창평)
 

곳감
녹차밭

■진상의 폐해

은어는 궁궐 사람들이 좋아하는 진상품이었다. 그러나 은어는 쉽게 부패해 신선한 상태로 궁궐까지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충분한 양을 확보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많은 지방수령에게 은어를 진상토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은어가 생산되지 않는 곳에도 은어를 진상토록 한 것이다. 지방 관리들이 은어를 내놓으라고 득달하자 백성들은 먼 곳까지 가 은어를 사서 진상품이라 바쳤다.

암행어사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본 최창대(崔昌大, 1669~1720)는 은어의 진상과 관련해 임금께 이렇게 보고했다.

‘은어의 진상은 도의 여러 읍에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옥과(전남 곡성)와 남원이 그렇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강에서 은어가 나와 나라에 바쳐왔으나 세월이 흘러 내와 못이 변해 은어가 없어진지 수년이 됐습니다. 은어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백성들은 양곡을 가지고 은어가 나는 하동, 진주에서 은어를 구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은어 두세 마리의 값이 500전이나 되니 이를 감당치 못해 도망간 백성이 10명 중 4~5명이나 됩니다’

순조 때 만들어진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당시의 물고기 가격이 적혀 있다. 기록을 참조해 은어 2~3마리의 가격을 추정해보면 500전 정도다. 500전은 지금 화폐가치로 2만5천~3만 원이다. 백성들에게는 한 명당 수 십 마리의 은어가 할당 됐을 텐데 이는 다른 세금으로 압박받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어란 젖갈

1862년(임술년) 철종 때 일어난 장흥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도 진상품 때문이었다. 장흥은 바다에 인접한 지리상의 특징으로 인해 염(鹽)·세모(細毛)·전죽(箭竹) 등이 특산물로 유명했으며 진상품도 여러 종류에 달했다. 문제는 구하기가 힘든 물품을 일률적으로 정해 백성들에게 바치도록 하고 물품이 없으면 돈으로 환산해 내도록 강요했다는 점이다.

당시 장흥도호부는 부내·부동면 등 16개 면으로 구성돼 있었다. 호수는 8천100 여 호에 달했다. 전라감영에서는 여러 읍과 면에 호구 수에 따라 100장 혹은 200장씩 거북이껍질(玳瑁皮:대모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거북이껍질은 바다 근처에 사는 어민들도 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돈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858년의 경우 거북이껍질 1장 값으로 내던 돈이 40~50냥에 불과했으나 해마다 값이 폭등했다. 4년 뒤인 임술년(1862년)에는 무려 3천400냥에 달했다. 지금 돈으로 치자면 1억 원이 훨씬 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값이 높아진 것은 그 안에 관리들과 아전들이 별도로 챙기는 몫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금과 진상품을 거두는 구조는 중앙의 각 아문→감영→해당군현→수세담당 이서(吏胥)등으로 짜여졌다. 그런데 수세기구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운반비·인정미·중간포흠(逋欠) 등 관리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떼어가는 돈이 많이 붙여졌다. 그래서 200만 원 정도 하던 거북이껍질이 4년 만에 억대로 뛰어버린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은 결국 백성들의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구한말의 조선은 삼천리 방방곡곡(坊坊曲曲) 어디를 가던 가난과 질병(疾病)이 만연(蔓延)했다. 백성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탐관오리에 맞서 싸우던지 아니면 거지가 돼 유랑걸식을 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백성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앉아서 죽느니, 억울함을 풀기라도 해보고 죽어야겠다고 민란을 일으켰다. 1860년부터 1894년 사이 조선 땅에서 발생한 민란은 무려 48회에 달했다. 1862년 한 해 동안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민란은 모두 37회였다. 진상품 등 각종 세금을 부과해 백성들을 수탈한 조정대신과 지방 관리들의 폭정은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도움말/김정호, 박선홍

사진제공/위직량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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