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5> 9장 다시 광주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는 낮이었다. 길바닥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천둥벌거숭이 꼴이었다. 아이들은 시커먼 얼굴에 눈동자만 반짝거렸다. 평양성내 인구의 반이 죽었다고 했다. 나머지 반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었다. 집이 불에 타거나 무너지고, 그나마 반반한 집은 점령한 왜군이 처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러 고기 한두 점을 입에 물고 다니는 것이다. 한양 도성에서 인육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은 금시초문이었다. 난리에 무슨 고기? 정충신은 아연 긴장했다. 이 자들도 결국 썩은 시체를 거둬다 먹는다? 그래서 정신이 아득했지만, 그건 꼭 그들의 괴기스런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충신도 사실은 몹시 허기가 졌다. 의주에서 내리 오백리 길을 내려오면서 줄곧 굶었다. 주막이나 객주집은 부숴졌거나 비어 있었고, 객관 역시 낯선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을도 빈 곳이 많았다. 편안하게 몸누일 곳, 밥얻어 먹을 곳이 없었다.

정충신이 대동문에 이르렀다. 나이든 사람이 고기 뼈다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무슨 고기입니까.”

나이든 사람이 말없이 칠성문 방향의 구렁창을 눈으로 가리켰다. 궁금하면 그리로 가보라는 뜻이었다. 정충신이 구렁창에 당도하니 더 움푹한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무엇인가를 헤집고 있었다. 헤집을 때마다 부패한 시체들이 들춰졌다. 시체들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헤집고 있는 것인데, 바로 말의 시체들이었다. 여름철이었다면 모두 부패했을 터인데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 탓인지 죽은 말들은 비교적 성했다. 목이 찔리거나 다리가 나갔거나 몸통이 창에 꽂힌 말들이었다. 기병을 한달음에 조질려면 말의 다리나 몸통, 목을 분질러놔야 했기 때문에 전쟁에선 말의 희생이 맨먼저 이루어졌다. 말의 사체를 헤집어낸 자들이 칼로 뱃살을 가르고, 목과 궁둥이 살을 도려내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피가 선연한 살덩이를 도려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어떤 아낙네는 내장을 한 소쿠리 담아 물 질질 흐르는 그대로 머리에 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나같이 사람의 꼴이 아니었지만, 사람의 시체를 거두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죽은 자를 손대지 않을만큼 말의 사체는 널려있었는데,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명군 기마병들이 들이닥쳤지만 왜군의 조총 앞에서는 허깨비 장난같더만.”

말의 눈알을 뽑아든 남자가 말했다. 그는 말의 눈알을 구워먹으면 맛있다는 흉노족의 말을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말이 부상을 입고 펄쩍 뛰면 명군은 영낙없이 고꾸라져서 즉사하거나 병신이 되어서 북북 기어가는데, 그때 왜군 병사가 달려들어 명 병사 가슴이나 등짝을 칼로 내리꽂아 죽이더라고. 명군놈들 완전 병신들이대... 내레 웃겨서 웃어버렸디. 처음엔 겁이 났디만 지나고 보니 구경하는 데두 재미가 있더마.”

“명군 새끼들 뼈도 못추리고 도망을 가는 것 보고 나는 웬지 시원하더라고. 왜군이나 명군이나 백성들에겐 모두 개새끼들이디. 우리를 도우러 온 놈이나, 침략한 놈들이나 모두 좆팽이치는 놈들이었다니까니...”

“그럼 조선군은 어떻구? 김명원 군대에 윤두수 이원익 고언배 장군이 나섰는데두 호랑이와 병아리 싸움이었디. 햐, 왜놈 새끼들 쥐새끼처럼 날쌔고, 독살스럽더만...”

“1차전은 말할 것 없구 2차, 3차전 때 깨지는 것 정말 장난 아니었디.”

조선군은 1592년 6월13일(음력)부터 사흘간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김명원 윤두수가 고니시 유키나가·구로다 나가마사 부대를 맞아 싸웠다. 고니시 왜 1군단은 한양을 함락시키고 6월 초하루 개성을 단시간에 집어삼킨 뒤 곧바로 평양성으로 들이닥쳤다. 선조가 평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진격한 것이었다. 그게 6월13일이고, 1차 전쟁이었다.

선조는 평양을 지키기로 했지만 광해군이 평양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아들에게 평양을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의주로 피했다. 광해군은 이천 분조를 떠나 평양에 당도했으나 적정상황이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세상 물정에 덜익은 열여덟살의 소년이었다. 미리 와있는 김명원 이원익에게 전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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